자캐커뮤니티 빛의 종말2 애프터 합작
Trigger Warning
상해, 유혈, 시체 훼손, 식인, 정신 착란
다음 글에는 위 트리거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당 요소를 접하시기 부적절하시거나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은 글을 읽는 것을 피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외에도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묘사가 표현되어 있으므로 주의를 당부합니다.
1
비행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몇은 선착장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눈을 맞으며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두가 배를 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합은 비감염자와 면역자만을 선별해서 태웠다. 감염자와 보균자, 그리고 탑승을 거부한 이들은 그대로 남겨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화를 냈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배가 떠오르자 당장의 울분은 접어두고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른 이들의 안녕을 빌며 외쳐댔다.
좀비로 뒤덮인 이 빅토리아 아일랜드에서 살아남은 자들끼리 기적처럼 모였다. 좀비와 싸우고, 때로는 사람들과도 전투를 벌였고 ‘우리’는 서로를 챙기며 간신히 버텼다. 지직거리는 라디오의 희미한 신호를 쫓아 발을 떼었고 겨우 탈출 선을 앞에 두었건만 차가운 이분법에 의해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탈 자격이 있는 자들과, 그럴 자격이 없는 자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고 들었지만, 배를 쥐고 있는 자들은 냉랭했다. 결국 몇몇이라도 배를 타고 안전한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아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은 이들이 선 땅은 생존을 장담하기 힘든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고작 며칠 후를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이들도 있었다.
라리안은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제정신을 유지하면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열이 끓어올라 이따금 의식이 희미해졌고, 그리고 ....... 아,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팠다. 무척이나. 라리안은 통증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나 의연한 척 서서 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배웅은 하고 싶었다. 많은 말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까지 그나마 멀쩡한 모습으로 그들의 시야에 남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물린 것이 자신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임무에 나가면서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미련도 크지 않았다. 죽음은 평등하다지만 저마다의 목숨에 매기고 있는 가치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 가치가 적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이 가장 낫다. 물린 이래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라리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따라서 라리안은 담담할 수가 있었다.
비행선이 점점 멀어져갔다. 사람들이 흔들던 손이 하나둘씩 천천히 내려갔다. 아마 비행선에 탄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눈앞이 가물가물해서 진작부터 보이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을 보고 추측했다. 그제야 라리안은 주저앉았다. 밧줄 자국이 짙게 남은 손목을, 두 번이나 물려 너덜해진 팔을, 곳곳에 푸른 멍이 든 몸을 부여잡고 감싸 안았다. 차가웠다. 체온은 열은 날뛰듯 끓어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비정상적으로 뚝 떨어지고는 했다. 라리안은 팔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버티기 힘들었다. 하필이면 보균 상태에서 물려서 병의 진전이 다른 이들보다 빨랐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이 오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일이 뭐가 있는가? 라리안은 흐린 정신으로 간신히 생각했다. 그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있을까?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라리안은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아른프리트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라리안님?”
입을 달싹였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라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없이 지켜보다가 일으켜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라리안은 몸을 내맡겼다. 걷는 것도 스스로 하기 힘들었다. 아까 그곳은 꽤 소란스러웠으니 좀비들이 몰려들지도 모른다고, 따라서 이동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까의 아지트로 돌아갈 것이다. 상당수가 떠나고 소수가 남았으니 상황을 재정비하고 앞으로 어찌할지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감염된 위험군이므로......
다리의 힘이 풀렸다. 발이 디뎌지질 않았다. 부축하는 이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거의 끌리는 모양새였다. 라리안은 힘겨웠고 지쳤다. 주저앉고 싶었다. 뭐가 어찌 되든 그들이 버리고 떠나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가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동료에 대한 정이든, 위험 요소에 대한 철저한 방비든지 간에.
2
라리안은 정말 걸음을 멈췄다. 눈앞이 명멸했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검어졌다. 미약한 두통이 일었다. 종잇장에 작은 불씨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 머릿속에 놓인 그 종잇장을 불씨는 서서히 까만 원을 그리며 태워나갔다. 무엇을 태웠을까? 이미 타버린 후에 들여다보는 것은 늦는다. 태워버린 것은 어떤 수로도 되돌릴 수 없다.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재만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불씨는 재를 품고 껌벅이다가 죽었다. 불이 죽자 재가 생명을 얻었다. 바람도 없이 휘날린다. 허공으로 떠올라 세상을 뒤덮는다. 뇌에 촘촘히 박힌다.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모른다. 그냥 알고 있다. 라리안은 그저 지켜본다. 잿가루는 수가 불어난다. 자리를 잡지 못한 재는 무겁고 날카로운 모래알갱이가 되어 버린다. 부유하던 흑사가 무게를 가진다. 순식간에 떨어진다. 검고 육중한 장막이 되어 쏟아지며 눈앞을 드리우고, 그리고
“라리안?”
일행 중 누군가가 라리안을 재촉했다. 라리안은 탁한 연기가 들어 찬 것만 같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3
“라리안.”
차분하고 앳된 아이의 음성이 울렸다. 친숙한 목소리였다. 라티에. 자신이 보호해주었고 손수 가르쳤던 아이. 친애하고 아끼는, 라티에 아르테미. 민트색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라리안. 질문이 있어요.”
라티에가 물어왔다. 라티에는 물음이 많았다. 항상 질문을 던지라고 일러준 건 라리안이었다. 주변에 서점의 이미지가 더해졌다. 높은 책장이 세워지고 책들이 채워진다. 서점이다. 에델슈타인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는 이상 항상 경계를 놓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끔 라리안도 경계를 풀고 안온하게 앉아있었던 장소. 커다란 창을 통해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노란 햇살이 뺨에, 팔에, 손끝에 닿았다. 따스했다. 긴장이 갑자기 풀렸다. 라리안은 무너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쓰러지는 걸 막으려고 탁자를 짚었다.
“무엇이니?”
담담하게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눈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런 일 없이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라리안은 흔들리는 모습을 쉽게 보인 적이 없었다. 다만 말을 건넬 때 목이 메어있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라티에는 의아해하는 기색 없이 차근차근 말했다.
“라리안은 우리가 모든 경험을 겪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렇기에 우리가 알지 못한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라고 했고요. 하지만 사람의 눈과 말이 잘못될 때처럼, 책 또한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고 했잖아요. 더군다나 책은 이상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현실과 비추어보아야 한다고 했었지요. 그래서요, 라리안의 말대로 현실에 비추어보았는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어요.”
고요한 서점에 작은 말소리가 울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익숙한 일상에 라리안은 천천히 차분함을 되찾아갔다. 라티에는 작은 두 손으로 든 책을 가만히 펼쳐보았다.
“라리안, 정말로 생명에 경중이 없는 것이 맞나요?”
아이의 고요한 눈이 라리안을 바라보았다. 라리안은 일순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의문이 그저 학문적 이론과 논쟁에 그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생명은 귀중하며 존중받아야 한다..... 이 얼마나 헛되고 안일한 도덕적 명제란 말인가? 평화 속에서나 빛을 발하는 문장이었다. 죽음이 얽힌 수많은 전투 앞에서는 무색해지는 말이었다. 상대를, 적을 죽여야 나와 내 동료가 산다. 이때 적진의 생명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었다. 때로는 모든 동료를 구할 수 없을 때 단 몇 명만을 선택해서 구해야했다. 모든 동료가 소중한 것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선택해야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살아남으려면 선택해야만 했다.
그건 지독한 현실이었다. 라리안은 라티에를 그런 현실에서 보호하고 싶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면서 비틀린 채 자라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라리안은 때로는 이상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안일하게 살게 내버려두다가는 세상에 당해 죽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라리안은 현실을 알려주었다.
“원칙대로라면 생명에 경중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맞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다만 우리는 사람이고, 수많은 상황 속에 놓이며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온단다. 두 갈래 선택의 양쪽 끝에 제각각의 목숨이 달려 있을 때도 있단다. 이건 결코 극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 아니란다. 너도 임무를 겪었으니 알 테지.”
라리안은 이번에도 현실을 택했다. 라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이 라리안은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그럼 기준을 어떻게 두어야 해요?”
애초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었다. 시간이 많았다면 기준을 정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라리안은 시간이 없었다. 자신은 떠난다. 라티에는 남을 것이다. 임의적인 기준을 진리인양 알려 줄 수밖에 없다. 훗날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만의 기준을 세울 때 까지 라티에가 희생되지 않을 기준을...... 라리안은 말했다.
“너를 신뢰하고 네가 신뢰하는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라. 안다. 신뢰가 쉬운 일은 아닐 거다. 그러나 네게도 신뢰할 이가 생길 테고 그때 그들을 동료라고 명명하고 목숨을 맡기어라.
가치를 가장 아래에 두어야 할 것은 네 목숨을 위협하는 자들이다.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더라도 그들은 너의 적들이란다.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지도, 방심하지도 말고 전투에 임하여라.
그리고 너의 목숨은 가장 우위에, 어떤 값어치도 매길 수 없는 곳에 두어라. 어떤 순간에도 네 목숨의 값을 의심하지 말거라, 라티에.”
4
“하, 좋은 말이네. 그럼 언니는?”
캐니안의 말이 불쑥 끼어들었다. 동시에 캐니안의 이미지가 라티에가 있던 자리에 덧칠되었다. 턱걸이에 팔꿈치를 박고 턱을 괸 삐딱한 태도로 라리안을 노려보는 자세였다. 캐니안, 동생. 사고뭉치이고 자주 충돌하곤 했지만 실력은 높이 샀었던 든든한 이. 라리안이 기꺼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이. 만약 라리안 자신이 사라진다면 뒤의 일을 모두 처리해줄 나의 동생.
“언니의 목숨은 어디있는데? 라티에에게 말한 것처럼 제일 우위에 두고 있어?”
라리안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캐니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떠들어댔다. 어조가 날카로웠다. 평소처럼 짓궂은 농담이나 던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말은 아주 잘-하고 있어. 이게 언니가 한 말만 아니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야. 마음에도 없는 말을 라티에에게 떠벌리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아? 아, 맞아. 양심이라니. 내가 언니에게 너무 무리한 걸 바라고 있구나?”
캐니안은 잔뜩 비야냥거렸다. 라티에가 있는 곳에서는 자제하던 어조였다. 라리안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답할 가치가 없었다. 캐니안은 과장된 몸짓으로 팔짱을 끼더니 입가를 끌어올려 사납게 미소지었다.
“언니는 죽음이 더 효율적이라면 죽음을 택할 거잖아?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라리안은 냉담하게 캐니안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마찬가지로 라티에가 보고 있지 않으니 너그럽게 돌려 말할 필요 없었다.
“다른 수가 있는 상황인 것처럼 얘기하는군. 죽음을 택할 정도면 대개 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는 걸 몰라?”
라리안은 책장을 넘기듯 차분하게, 그리고 건조하게 말했다. 캐니안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게 문제라고, 그거! 죽음을 일단 포함시키고 시작하는 계산법!”
“다른 방도가 없을 경우라고 말했을 텐데. 그리고 캐니안. 무르게 굴지마. 어떤 희생도 없이 마냥 평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네가 그렇게 순진했던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캐니안은 소리를 내질렀다. 귀를 막을 듯 손을 귓가에서 쥐었다 펴다가 애먼 후드자락을 꾹 쥐었다. 캐니안이 가장했던 여유가 흐트러지는 것을 라리안은 알 수 있었다.
“말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죽음을 각오한다고? 아주 멋있는 포장이네. 근데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아니지. 언니는 그냥 자기 목숨에 대해 별 가치를 두지 있지 않은 것이잖아. 그러니까 버릴 생각도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하는 거잖아!”
캐니안은 격정에 차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내버려 두면 무슨 사단이라도 낼 것 같은 낌새였다. 캐니안을 달래려면 라리안이 한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라리안은 일부로 차갑게 말했다.
“감정적으로 가치를 부여한다면 뭐가 달라지지? 선택지를 가로막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뿐이야.”
수십 년 인생을 하루 만에 돌이킬 수 없었으니, 자신의 주장을 유지해야 했다. 더군다나 정말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래서 그리 말했다. 캐니안이 고개를 들었다. 경멸어린 표정이었다.
“언니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합리적으로 생각해, 캐니안.”
캐니안은 탁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탁자에 놓인 찻잔이 쏟아지며 책 위에 엎질러졌다. 라리안은 힐끔 보고 말았으며 캐니안은 애초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책의 글씨들이 찻물이 흐르는 대로 번지며 망가져갔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역겨워. 지겨워. 언제까지 이 글러먹은 행동을 지켜봐야해? 왜 이딴 자식이 내 언니야? 모든 걸 합리적으로 생각하자고? 야, 라리안. 네가 죽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무너지는 건 합리에 안 들어가지? 하긴 자기는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텐데 뭘 알겠어?”
라리안은 침묵했다. 캐니안의 신랄한 비난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수없이 반복되었던 싸움이었고, 몇 마디 변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나긴 비틀림이었다. 캐니안은 훌쩍 돌아섰고 라리안은 붙잡지 않았다. 언제까지냐고? 이번 대화가 마지막일 것이다. 자신은 이미 병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침묵했다. 병든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이런 대화가 낫게 느껴졌다.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서점에 있을 수 있었더라......?
라리안? 라리안씨? 다른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겹쳐졌다. 서점의 책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엘레니아의 높은 나무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햇살 같은 건 없었다. 세상은 검었다. 눈발 사이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윤곽이 드문드문 보였다. 구조선에 타지 못한 이들. 멀리 걸어 나간 캐니안이 눈물을 훔쳐내는 것이 보였다. 뭐가 진짜지? 방금 것은 꿈이었을까? 환각? 어디까지가 허상이었지?
항상 그랬지. 어디 목숨뿐이야? 언니는 처음부터 세상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았잖아?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방관하지. 나는? 나는 어쩌라고. 그러니까, 제발......
캐니안이 울먹이는 소리가 방향 없이 울렸다. 라리안은 생략된 말을 알아들었다. 살라고. 참으로 달콤한 말이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어지러웠다. 서점의 벽이 일렁거리며 윤곽을 세웠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캐니안의 말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강경하게 나가기 위해 오해를 바로 잡지는 않았지만, 라리안이 목숨을 결코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증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미 삶을 포기했다는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에 떠올리기로 했다.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정신을 다잡을 여유는 없었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여긴 전장이었다. 중요한 건 바른 선택이 아니라 빠른 선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다만 잔열이 남아있었고 기운도 없어 다리가 꺾였다. 라리안은 멈춰 섰다. 아른프리트가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의아하게 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경계하는 낯빛으로 바뀌기 전이었다. 무장한 인원이 열 댓 명, 그에 비해 라리안은 맨손에 혼자였다. 도망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문득 발밑에 검은 허공이 보였다. 땅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눈송이가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5
라리안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며 눈발이 뒤섞인 암흑 속으로 잠기며 들었던 생각이었다. 극한에 몰렸을 때 튀어나오는 생존 본능 같은 것이 아니었다. 추락하는 가운데 귓가를 스친 바람의 속삭임이었고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사이에서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살아야 해. 그 몸을 잘 간수해야해. 죽음 너머에도 삶이 있거든. 너는 걷고 배회하고 말하고 속이고 공격하고 물고 죽이고 먹어야 하거든. 휘몰아치는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덩굴이 잔뜩 얽혀 라리안을 붙잡아 세워 낙하가 멈출 때까지, 귀에 울렸다. 그렇구나. 라리안은 수긍해버렸다. 그래서 라리안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라리안의 생각이 아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이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6
생각.
라리안은 항상 생각을 했다. 습관처럼 사고를 굴렸다. 그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하면 반사적으로 머리가 돌아갔고 순식간에 결론이 떨어졌다. 이는 그녀 스스로가 높이 여기는 자신의 가치였다. 해서 생각이 해가 되리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당장 약간의 문제를 불러올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이 될 거라 여겼다.
라리안은 그 의견을 철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생각 중에서 간신히 잡아낸 멀쩡한 종류의 것이었다.
버려진 집의 깨진 창문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희미한 흰빛에는 여린 아름다움이 깃들어있었다. 시선을 잠시 집중하는 동안 모든 것을 잠시 잊게 해주는 빛이었다. 라리안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구름에 가려지며 사라졌다. 라리안은 한동안 잔상을 지켜보다가 두어 번 콜록거렸다.
어둠 속의 정적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런 밤에는 잠에 들지 않은 이라면 누구나 생각이 많아진다. 라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했다. 붙잡을 수 없는 생각의 흐름이 불어나고 뒤틀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어린아이가 자기 전에 떠올린 무서운 생각처럼 멈추고 싶다고 멈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문제가 생긴 듯 이상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환각이 보였고 환청이 들렸었다. 세상을 인지하는 장치가 고장난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을 믿어선 안 되었다. 그럴수록 판단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야 했다. 제대로 생각해서 잘못된 걸 분간해내고 옳은 것을 골라내야 하니까. 그건 이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라리안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진정하라면서 지연제를 들고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동료의 부름을 외면했었으며 자연스럽게 낭떠러지로 걸어 들어가는 라티에의 모습을 수없이 지워냈었다. 자신은 나무에서 떨어져 그들과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저들이 나를 벌써 따라잡았을 리 없다. 그리고 자신은 지연제가 먹히지 않는다. 저들도 그걸 안다. 라티에는 이곳에 있지 않다. 라티에는 에델슈타인에 있고 여긴 엘레니아다......... 그러나 점점 한계에 이르렀다. 라리안은 어느 버려진 집을 발견하고 그 안에 틀어박혔다. 전 동료들의 추적을 예상한다면 더 멀리 가야 했었다. 그러나 더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라리안은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판단체계가 점점 무너져가고 사고가 삐걱거리며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라리안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만약 머리가 멀쩡했다면 생각이 주체할 수 없이 불어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생각의 양은 문제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문제는 내용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이런 생각이 주체할 수 없이 마구잡이로 떠오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끔찍한 충동이 돌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감히 고하지 못할 잔혹한 소망들이었다. 사람, 사람을. 사실 사람이 아니더라도 피가 돌고 날뛸 줄 아는 모든 생명체를. 그래도 그중에서 강렬히 열망하는 건 사람. 사람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가죽을 찢어발기고 갈기갈기 찢어내어 두 손안에 가득 움켜쥐었으면. 붉은 살점이 툭툭 떨어질 테지. 산 자의 심장을 꿰뚫었으면. 손아귀 아래에서 맥박이 죽어가는 것을 느껴보았으면. 피가 뿜어져 사방을 적시고 고이다가 흐를 테고 그 붉은 선이 그려나갈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이 자신을......
아, 라리안은 고개를 손에 파묻었다. 그리고 강하게 짓눌렀다. 손끝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을 주자 통증에 생각이 흩어졌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떼었다. 이상하게도 감각이 점점 무뎌져 가서 이 방법이 잘 듣지를 않았다. 떠올렸던 잔인한 이미지는 흩어졌으나 심장은 아직 조바심을 내며 들썩이고 있었다.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만가만 자신을 달래가다가 라리안은 고개를 꺾었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의식 아래로 사라졌다가도 다시 나타난다. 강렬한 생각은 환각을 불러내고 환각은 그대로 기억에 박히며 사라진 후에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억지로 지켜보다보면 감상이 따라붙는다. 아름답다, 현란하다, 매혹적이다. 그럴 때 마다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라리안은 부정했다. 자신의 감정이 아니다. 무언가가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었다. 머리는 이제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라리안은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독한 약을 마시든 기절시켜 억지로 의식을 끊든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 누가 멈춰주기를 바랬다. 과거의, 혹은 단 몇 시간 전의 자신은 어떻게 냉철하고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파괴적인 충동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었던 같았다. 모든 것에도 무감각할 수 있었던 순간이 분명 있기는 있었는데......
라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달이 보였다. 창백하고 찬란한 빛에는 마력이 있었다. 이유 모를 안도감과 함께 생각이 희뿌옇게 흐려졌고 힘이 풀렸다. 라리안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들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아득함이 주위를 휘감았다. 그러나 그것을 경계하기에는 라리안은 너무 지쳐있었다.
잠에 빠지기 전에 실낱같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온 하늘에는 구름이 드리워져 있을 텐데. 어떻게 달을 볼 수 있었지?
7
새가 울었다. 마치 비명소리처럼 울렸다.
라리안은 깨어났다. 고개를 드니 푸른 그림자가 버려진 집안에 드리워져 있었다.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사물을 판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시야는 맑고 선명했다. 며칠간 열에 달떠 사방이 흐릿했던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눈앞을 매만져보다가 비스듬히 걸린 안경이 손끝에 걸렸다. 끌어내어 버렸다. 이제는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라리안은 한발 내밀어 걸었다. 믿을 수 없이 몸 상태는 좋았다. 통증이 싹 가셨다. 몸을 움직이는데 걸릴 것이 없었고 정신이 맑았다.
라리안은 집 밖으로 나와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겨울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가만히 내쉬려는 순간 라리안을 그사이에 섞인 다른 것을 잡아냈다. 흐릿하지만 자극적인 혈 향, 커닝시티에 들어간 이후로 질리도록 맡았던 비리고 역겨웠던 피 냄새였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라리안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역겨웠다고? 이 향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피 내음을 향해 한 발 내딛자 훅 끼쳐 올라오며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 넓은 숲에서 어떻게 시체를 찾아냈는지 모른다. 의식이 또 끊겨서 정신을 차려보니 시체 앞에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렸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달려왔을까?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숨이 가쁘게 차올라서 라리안은 입을 손으로 덮었다. 언제 달렸지? 맥박이 요동쳤다. 모든 감각이 날뛰고 있었다. 대체 자신이 얼마나 달렸기에.
......아니.
달려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라리안은 입을 가린 손을 떼었다. 어느새 라리안은 웃고 있었다. 비실비실 입가가 올라갔다. 수년 동안 붙어있던 무덤덤한 표정이 틀어졌다. 눈꼬리가 휘었고 눈이 가늘어졌으며, 입이 크게 벌어진다. 이 짜릿한 환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깊은숨을 들이켰고, 곧
광기어린 웃음이 튀어나왔다.
숲이 요동칠 정도로 울렸다. 새가 화들짝 놀라 날아갔다. 그러나 라리안은 신경 쓰지 않고 웃어 재꼈다. 생전에 그리 소리내어 웃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죽어서야 라리안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잔뜩 뒤틀린 형태로, 맹렬하게, 몸이 뒤흔들릴 정도로 들썩이다가 몸을 젖혔고 시체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폐를 끄집어낼 듯이 웃다가 서서히 가라앉혔다. 그러나 아직 입가는 다물어지지 않았다. 단지 피, 혈향, 살점, 겨우 그뿐이었는데 그것이 라리안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흥분이 차올라 머리를 두들기는 통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라리안은 기껍게 휘말렸다. 라리안은 시체를 두고 눈빛을 번뜩였다. 한밤중에 섬뜩하게 빛나는 짐승의 인광을 닮았다. 그녀를 알던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믿지 않을 괴기한 모습이었다. 라리안은 더없이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등을 활처럼 휘었다. 머리카락을 걷어내어 귓가에 걸고 고개를 숙여 시체에 입이라도 맞출 듯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8
저승의 음식을 먹은 자는 저승에 속하게 되며 이승에는 다시 올라갈 수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 - 페르세포네 설화 中]
9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라리안은 헤집어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웠으며 얼음조각이 섞여 있어서 지나치게 딱딱했다. 죽은 지 꽤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미 부패도 진행되고 있었겠지. 만족감이 일순간 몸을 채웠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부족했다. 라리안은 극한까지 충족시키고 싶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라리안은 썩은 살점이 붙어있는 시체의 손뼈를 쓰다듬었다가 밀어내었다. 손뼈 아래에는 서리가 낀 스태프가 마른 풀 속에 잠겨있었다. 시체는 생전에 마법사였을까? 라리안은 스태프를 끄집어내어 유심히 살폈다. 고목나무로 만들어진 길고 가볍고 끝이 둥근 지팡이었다. 본인이 쓰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무게감이 없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라도 아쉬운 마당이니 별수 없었다.
본래 쓰던 스태프가 생각났다. 왜 지금은 없는 거지? 맞아, 포박당하면서 손에서 놓았다. 빼앗겼던가? 누가 가져갔던가? 이유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 회수해와야겠지. 그들에게로 가자. 그들이 지금까지 스태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가자. 왜냐하면 라리안이 엘레니아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흔하게 널린 시체와는 다르게 신선한 이들, 목적 없이 배회하는 시체들이 유일하게 갈구하는 것을 가진 사람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라리안은 걷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경쾌하고 가벼운 걸음이 눈을 짓밟았다. 겨울 하늘은 희었고 나무는 검었다. 색채가 지워지자 굵고 곧게 세워진 나무들은 그저 거대한 묘비로 보였다. 사방은 고요했다. 풀벌레들은 모조리 죽었을 테고 동물들 또한 질병에 전염되어 미쳐 날뛰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빅토리아 아일랜드는 이미 종말에 이르렀다. 커닝시티, 헤네시스, 리스 항구, 페리온, 엘레니아, 슬리피우드, ...... . 한때 다채로운 문화가 융성했던 곳들에서는 저마다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넓은 섬은 거대한 그저 무덤이었다.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릴 듯 폭설이 다시 휘날리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라리안의 뺨에 앉았다. 체온에 녹는 대신 핏물과 엉겨 얼어붙었다. 라리안은 귀찮다는 듯 쓸어내었다.
어디선가 괴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라리안은 웃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백업용입니다, 백업용. 내용 아시잖아요. 괜히 들어가서 비참해하지 마세요.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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