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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법정 AU



라리안, 책 속의 원칙이 현실과 다르다면 내가 배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사무실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던 라티에는 난데없이 그리 물어왔다. 라리안은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아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라티에가 들고 있는 책은 법의 역할에 대해 청소년 수준으로 설명하던 책이었다. 며칠 전에 그 책을 가지고 법의 의의에 대해 가르쳐준 적도 있었다. 무엇을 보고 저리 묻는 것일까? 라리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침묵이 길어지자 라티에는 라리안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 질문이 라리안의 심기를 건드렸나요?”

 

어떠한 불안이나 머뭇거림 없이 라티에는 말했다. 라티에는 그런 아이였다. 행동에 어떤 선의나 악의도 없다. 의도는 대다수가 감정에 의해 생기는데 저 아이는 감정이 결핍되어 있었으니. 그건 라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입하고 공감하기 힘들어했다. 어쩌면 그건 검사로서 흠이 되는 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리안은 일은 완벽하게 해내었다. 애초에 검사 일에 있어서 그들의 사정에 동조하며 열정에 차올라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새내기들이나 주로 택하는 방식이었다.

 

아니, 네 질문이 나를 화나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만약 다른 이들이 불쾌하게 여길법한 질문이라도 내게 하는 것은 상관없다. 다만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하구나. 맥락을 알아야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라리안은 서류를 아예 놓고 라티에 앞에 마주 앉았고 라티에는 책을 놓고 코코아를 붙들었다. 조금씩 홀짝거리며 라티에는 이야기를 꺼냈다.

 

라리안이 그랬잖아요, 법은......”

국가권력에 의하여 강제되는 사회규범이다.”

맞아요.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지켜야 하는 공동 규범이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해둔 것, 이라고 하셨어요.”

 

라티에는 슬그머니 각설탕에 손을 뻗었다. 라리안은 흘낏 보고선 각설탕을 라티에 쪽으로 밀어주었다. 라티에는 라리안을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고 두어 개를 집어 코코아에 퐁당퐁당 넣었다. 천천히 휘저으며 라티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법이 있기 때문에 사회의 크고 작은 분쟁을 판가름할 수 있고, 잘못된 행위를 분간하여 처벌할 수 있고,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하셨죠. 또한 모든 법률인은 법률의 실시와 집행, 사법 공정의 수호를 위해 종사해야 한다고 했었어요.”

 

통상적인 말들이 흘러나온다. 아마 라티에가 방금 쥐고 있던 책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언젠가 일러주었을지도 모른다. 라리안은 그저 수긍하며 듣고만 있었다. 라티에는 잠시 다시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삼키고 더 이상 설탕을 넣는 일 없이 가만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요즘 라리안의 활동이 그것에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검사 라리안은, 눈앞의 아이를 차분히 지켜보았다. 아이에게는 어떤 경고도 만류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물음일 것이었다. 그러나 걸리는 구석이 있는 이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게 되기 마련이다.

 

너에게 내가 그렇게 보였구나.”

.”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그랬니?”

그분을 만난 이후로 말이에요, 아른프리트 판사님.”

 

예상하던 답변이 나왔다. 그래서 라리안은 크게 당황하는 일 없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라리안은 업무 이야기를 사적으로 자세하게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라티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라티에는 하교 후 라리안이 퇴근할 때까지 오랜 시간을 사무실에 붙어 있는다. 알아차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당연히 아이를 내보낸다. 라티에가 아는 것은 아른프리트와의 접촉이 늘었다, 거기까지 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유추해낼 만큼 자신이 노골적으로 행동했는가? 그러는 사이 다시 라티에가 입을 열었다.

 

아른프리트 판사님은 어떠신 분인가요?”

아른프리트씨라...... 그 사람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희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백발이었다. 호의적인 태도로 사람을 대하지만 때로는 길고 날카롭게 휘어질 줄 아는 눈매와 금안. 그러나 라티에가 묻는 것은 외양이 아닐 것이다. 라리안은 지난번의 그녀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예의 바르고.”

 

, 잘 부탁해요. 으응, 되게 정직해 보이는 검사님이시네요. 이번에 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영향력 있고.”

 

검사님도 법조계가 돌아가는 상황은 충분히 알고 계시겠죠? 솔직히 생각해봐요. 지금 이 상황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이쪽? 이쪽? 나는 검사님이 잘 판단하시리라 믿어요.’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와아, 나는 판단이 빠른 분이 너무 좋아요.’

 

유능하며.”

 

그렇다면 검사님. 제 부탁 몇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어려운 건 아니고 간단하지만 라리안님의 협조가 꼭 필요한 일인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주일. 그러면 법적으로 문제 되지는 않게 처리해드리지요.’

 

어머, 깔끔하네요. 이게 당신의 방식이군요.’

 

, 빈틈이 없는 자이다.”

 

 

그것 말고요.”

 

라티에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역량이나 사무적인 측면의 평가 말고요. .....그 사람은 법률인으로서 정당히 행동하는 사람인가요?”

 

라리안은 차분하게 자기가 할 말을 정리해보았다. 라리안은 라티에의 보호자이자 교육자였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 말할 때 라리안은 자연스레 신중해지곤 했다. 본인의 설명이 앞으로 그 아이의 세상에 대한 인식을 결정할 테니. 때로는 이상적인 사회를 말해주었고 때로는 냉정하게 현실을 얘기해주었다. 둘 다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어떤 이인가 정의 짓는 문제이기도 했다.

 

라티에, 네가 처음에 했던 질문을 기억하니?”

잠시만요...... 책 속의 원칙이 현실과 다르다면 내가 배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 이거였어요.”

 

라티에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했고 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과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단다. 현실은 유동적이고 변수가 많으니 별수 없다. 그러나 라티에,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었던 과학을 기억하느냐. 물체를 움직이고 그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할 때 마찰과 공기의 저항 등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공간을 가정하지. 물론 마찰이 없는 공간은 없단다. 그러나 이상 공간을 가정하는 것을 쓸모없다고 치부하지 않는다. 반드시 들어맞지는 않아도 이상공간에서의 계산을 근간으로 현실 공간의 물체의 움직임을 계산하지. 이것을 비유로 들어보겠다. 원칙은 이상 공간에서의 과학 법칙과 같은 것이란다. 아무리 예측하기 힘든 현실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원칙이라도 일단 두는 것은 의의가 있기 때문이란다.”

 

궤변이라고 생각되었다. 라리안에게 원칙 같은 건 필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 써먹는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라리안은 원칙의 가치 따위를 내려놓고 행동해도 된다고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원칙이 언제나 공명정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이 바르게 돌아가지 않으니 책 속의 원칙이 오히려 올곧았다. 라리안은 이미 현실에 물들었고, 따라서 그런 원칙 같은 걸 우습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라티에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라티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라티에는 생각하는지 잠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논리정연한 말이 따라붙었다.

 

라리안의 말도 맞아요. 하지만 있잖아요, 법을 원칙으로 칠게요. 세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법에 근간을 두고 돌아가요. 법을 어기면 처벌받죠. 과학은 계산이 틀리면 그게 끝이지만 현실은 어긋나면, 처벌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게 라리안이 하는 일이고요. 법을 어긴 이에게 처벌을 유도하는 것이요...... 아른프리트씨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이를테면, 그분과의 만남이 라리안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나요?”

 

라리안은 잠시 검찰청법과 검사 징계법에 관한 내용을 떠올렸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동업인으로서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을 법한 내역으로 해석할 수 있을 수준이리라 생각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위험한 부분에 대한 증거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위반된다고 하더라도 법정에서 수년간 일한 검사로써 무죄 판결을 유도할 자신 있었다. 그리고......자신이 위험에 발칵 되었을 때 아른프리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다. 과연 꼬리를 자르듯 물러날 것인지, 구하려 들것인지. 그러나 라리안은 눈앞의 아이에게 단호하게 못 박아두었다.

 

내가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티에는 라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가만히 머그잔을 쥐고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답했다.

 

그거면 되었어요.”

 

석양이 비쳐들었다. 석양빛이 눈에 정면으로 드는 바람에 둘은 석양빛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라티에를 데리고 퇴근할 시간이었다. 라티에는 머그잔을 내려놓고 학교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라리안이 일을 정리하는 동안 항상 문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라티에는 문가로 먼저 종종 걸어가며 문고리를 잡고 라리안을 돌아보았다.

 

나는 라리안을 언제나 믿어요.”

 

아이가 문을 닫았고 라리안은 석양이 비쳐드는 사무실에서 수많은 서류 더미 앞에 두고 한참을 홀로 서 있었다.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라리안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 회청색 정장을 꺼내 입었고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찼다. 오늘 재판이 이뤄지는 법원은 먼 곳이어서 아침 일찍 출발해야했다. 라티에는 제 방에서 아직 자고 있었다. 라리안은 잠시 들여다보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오늘 일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해두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혼자서 밥을 챙겨 먹고 등교할 수 있는 아이였다.

 

라리안은 차에 시동을 걸었고 서서히 움직였다. 아직 어스름한 시각이었다. 차가 새벽의 도시를 빠르게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라리안은 속도를 올려 달렸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라리안을 믿어요.’

 

가장 큰 것은 라티에였다. 라티에는 라리안이 하고 있는 일을 알았다. 그것이 퍽 도덕적이지는 못하다는 것 또한 눈치챘다. 그리고 수긍했다. 행동의 주체가 라리안이라서. 차후 라티에는 도덕을 어기는 것에 반감 없이 자라게 될 것이다. 라리안이 그런 사람으로 자라났듯.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순수한 아이의 시선은 어른들의 행동을 돌아보게 만든다.

 

라리안은 속도를 높였다. 엔진소리가 높아지며 귓가를 메웠다. 라리안은 소음에 파묻혀 상념을 지워내었다. 그런 망설임이 부질없다는 것은 이미 옛적에 깨달았다.

 

법원 건물에 도착했다. 재판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라리안은 피고인을 만나 보러 가기로 했다. 재판을 받기 전까지 교도소에서 온 이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향했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서성이는 것이 초초한 심정을 억누르는 낌새였다.

 

누구신가요?”

 

라리안이 다가서자 그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라리안은 검사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이번 사건의 검사 라리안이라고 합니다. 피고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가 눈을 둥글게 뜨며 걸어 나왔다. 그가 선 곳은 어두운 곳이었고 앞으로 나오자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불꽃 같은 새빨간 곱슬머리를 기른 사내였다. 선명한 금안을 가졌고 방금 분명 경직되었을 입가에는 가만히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인상은 제법 유한 쪽에 속했겠지만 붉은 머리칼이 강렬해서 한번 보았다면 쉬이 남을 법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검사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피고인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 러브 굿니스라고 합니다.”

“아, 변호사분이셨군요.”

 

라리안은 어렵지 않게 그자를 기억해냈다. 서류속의 그 남자였다. 분량이 제법 있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그녀가 내밀었던 서류. 그러나 모르는 듯 표정을 담담히 유지했다. 감정을 가장하여 속이는 것보다는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것이 라리안의 방식이었다.

 

죄송하지만 뵙지 못 한분이신 것 같군요. 신임이십니까?”


그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라리안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몇 달 전이었다. 다른 재판 때문에 법정에 들렸을 때의 일이었다. 재판을 끝내고 돌아가려던 중 누군가라 라리안을 불렀다.

 

라리안 검사님!”

 

아른프리트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구두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법정 건물 로비였고 지나가는 사람이 꽤 되었다. 공공연한 접촉이었다. 대외적으로 어느 정도 교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챌 수는 있었다. 다만 이런 인사치례로 의심씩이나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차후에 꼬투리를 잡혔을 때 법에 문제 되지 않는 선의 교류였다며 흐지부지 시킬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라리안은 아른프리트의 의도를 이해했고, 대신 철저하게 공적인 업무인 듯 행동했다.

 

반갑습니다. 아른프리트 판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딱딱하게 말하며 고개를 까딱이자 아른프리트가 생긋 웃으며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저희 측에서 드려야 하는 서류에요. 아무래도 직접 전해드리는 게 마음이 놓여서요.”

 

아른프리트는 라리안에게 두툼한 서류철을 건넸다. 겉면은 평범한 법적 서류였고 실제로도 반 정도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 다른 것이 섞여 있을 것이다. 라리안이 담담히 서류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 라리안은 보고 아른프리트는 화제를 돌리는 것처럼 말했다. 묘한 눈짓과 함께.

 

다음 재판에서 변호사는 러브 굿니스 라는 사람이더군요.”

 

서류의 내용에 대한 암시다. 그 변호사에 대한 인적사항, 개인 정보, 그가 맡았던 사건들이 실려 있을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는지 라리안도 묻지 않았고 아른프리트도 말하지 않았다. 그다지 합법적인 경로는 아니겠지만 라리안은 문제 삼지 않았다. 라리안이 최대한 법을 준수하는 방향 내에서 움직이는 것은 문제가 될 가능성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지 그녀 자신이 정의롭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법을 어기되 결코 흔적이 남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하는 아른프리트의 방식에도 협조할 수 있었다. 라리안은 그 자리에서 펼쳐보는 대신 서류 겉면을 훑어보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처음 듣는 자군요. 이쪽 업계에서 일했다면 얼추 소식을 들어봤을 법도 한데.”

민사 소송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더군요.”

넘어오다니, 신기하군요. 이유는?”

, 그거 말인가요? 이번 사건의 피고인과 변호사가 꽤 친밀한 관계에요. 사이가 어지간히 좋은지 변호사가 변호를 자청했다고 하더라요.”

“......그러고보니, 1심때는 변호사를 선임할 여력이 없어 국선 변호사가 피고인을 맡았지요. 어찌 변호사가 붙었다 싶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애착, 혹은 예의. 어느 쪽이든 라리안은 무른 접근이라고 판단했다. 사적인 감정으로 접근하다니. 가까운 이에 대한 감정으로 접근할 만큼 이 형사 재판장을 만만하게 여기는 건지, 아니면 원래 분야를 버리고 올만큼 절박한 건지......

 

피고인은 아직 앞날이 창창한 소년이더군요.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지만 뭐....어쩌겠어요.”

 

아른프리트는 단정한 손끝으로 감싼 팔을 톡톡 두드렸다. ‘주장’. 그 단어를 내뱉는 어조에서 라리안은 미묘한 감정을 읽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정도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꼬리가 잡힐 만한 긴말은 필요하지 않다. 방금 나눈 대화로 충분했다.

 






 

아니요.”


러브 굿니스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라리안은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저는 그동안 민사 재판을 맡았습니다. 형사재판으로 넘어 온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아른프리트와의 대화가 겹쳐 들렸다. 알고 있는 대로였다. 라리안은 내색하는 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러브는 제법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며 악수를 청하였다.

 

라리안 검사님 소식은 몇 번 들었어요. 형사 재판을 주로 맡으시죠? 유명하시더군요. 냉철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재판에 임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잘 부탁드려요.”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저 또한 잘 부탁드립니다.”

 

라리안 또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았다.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자는 눈이 선명한 금빛으로 빛나는 사람이었기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라리안은 볼 수 있었다. 웃음으로 불안을 숨기려드는 것도. 라리안 또한 무표정을 빌어 기만을 숨겼다. 이건 비즈니스였고, 서로가 어떤 이들이든 간에 법정에 서는 순간 대적자가 될 것이었다. 한 손은 내밀어 손을 흔들고 다른 손은 뒤로. 상대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라리안은 왼손에 다른 것을 쥐고 있었다.

 

 





재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라리안은 변호사 측을 얼핏 보았다. 겁에 떨고 있는 소년과 신중한, 그러나 열의에 찬 눈빛을 가진 청년이 있었다. 동정은 검사의 덕목이 아니었다. 라리안은 그들에게서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재판은 유죄 판결이 날 것이다. 이미 판이 그렇게 짜여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형사재판이었다. 그러나 깊숙이 파고들면 그렇지 않았다. 지금 법조계에 몇 갈래로 나누어지는 흐름이 있었고 몇몇 법조인들은 어느 쪽에 설지 정해야 했다. 그들의 영향력은 재판장에도 흘러들었다. 재판의 승패는 곧 그들의 영향력에 의해 결정된다. 때로는 몇 재판의 승소를 내주고 다른 재판의 승소를 받기도 한다. 모든 사건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번 재판은 그리 얽혀있었다. 피고인 소년에게는 운이 나빴다. 이제 막 형사재판장으로 흘러들어온 저 청년은 그 사실을 알까?

 

유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재판에 들어서자 올곧게 바로잡혔다. 황금빛 눈이 빛났다. 피고인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애초에 변호를 자청하여 형사 재판으로 넘어올 정도로. 지인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법정에 줄을 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르고 있겠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모두 일어나주시길 바랍니다.”

 

판사들이 펄럭이는 검은 의복을 갖춰 입은 채 들어왔다. 재판장은 아른프리트였다. 아른프리트는 중앙에 앉아 재판장을 둘러보았다.

 

보기 좋은 연극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섭외된 배우인 것은 아니다. 결말이 이미 짜인 연극인 줄 모르고 열심히 항변할 변호사와 위태로운 희망을 걸고 있는 피고인, 스스로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며 판단하려들 몇몇 배심원, 정의가 내려지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방청객들이 뒤섞여있었다. 라리안이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 변호사를 꺾고, 배심원을 연극에 동참하게 만들며, 그것이 곧 정의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실제로도 이겨야 하는 것이다.

 

연극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나갈 가능성은? 없다. 이곳은 이미 그녀의 판이었다. 아른프리트가 계획했고 세워진 재판이었다. 재판은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갈 것이다. 게다가 아른프리트가 재판장이었으니, 그녀의 판결로 마무리가 지어질 것이다. 곁에 있는 두 판사와도 모종의 협의가 이미 있었을 것이다. 아른프리트가 더 철저하다면 배심원 사이에도 그녀의 인사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검사가 이미 아른프리트의 편이지.

 

검사 라리안은 긴장을 팽팽히 세웠다. 배심원과 방청객들이 판결을 납득하게 만들려면, 라리안은 최선을 다해 상대를 몰아붙여야 했다. 라리안은 확정된 승리라고 한들 태만하게 긴장을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펄럭이는 긴 의복을 입고 재판장에 걸어 들어온 아른프리트는 가운데에 차분히 앉았다. 재판장이 앉자 사람들이 법정의 저마다의 자리에 앉았다. 아른프리트는 재판장을 둘러보았다. 배심원에게, 변호사에게, 그리고 검사에게 눈길을 한 번씩 던지고 낭독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2018224, 고등법원, 사건번호 0814의 재판을 시작합니다.”

 

아른프리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어진 순서를 따라 법정에 선 이들은 선서를 읊었다. 누군가는 성실히, 누군가는 담담히, 누군가는 긴장 어린 채로 말하였다. 고요한 재판장에 무색하게 흘렀고 흩어진다. 의미가 없는 선서였다.

 

그리고 재판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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