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엔리카는 온기를 머금기 위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을 따라 찻물이 일렁거린다. 잔잔한 파문이었다. 엔리카는 레이피스에게 그 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내면도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선득하거나 아릴지라도 규모만 보면 고요한 울림이라고. 그런데도 마치 폭풍이 바닥까지 긁어 헤집은 듯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수없이 되짚어본 기억이다. 아픈 기억들이 있었고 행복한 기억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행복했기에 슬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락이라고까지 칭하기에는 자신의 일들이 사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만.
“엔리카......”
엔리카는 레이피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그를 보거나 화답할 수는 없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음성이어서, 이미 감정들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지 못 하고 후드득 떨어지고 있어서.
엔리카는 감정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황급하게 잇느라 띄엄띄엄 끊겼다. 엔리카는 아무 말이나 주워 삼키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다른 수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잃거나 상처 같은 것들을 얻어서 돌아오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없더라도 시시때때로 올라와 그 순간을 되짚게 만들지요. 숨이 턱 막히고 막막해지는 거대한 절망을. 네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면서 속삭이지요. 언젠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영영 나락 같은 것을 몰랐다면 모를까, 한번 알아버렸으니까요.”
레이피스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생긴 공백 속으로 창에 한번 걸러져 먹먹해진 빗소리가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손이 맞닿아 전해진 온기가 있었고 따스한 배려가 있었다. 엔리카는 숨을 고르게 내쉬며 한층 추스를 수 있었다.
엔리카는 비가 언젠가는 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가 오면 구름이 모이고 그제야 퍼붓는 것이라고 여겼다. 비록 그것이 징조도 없이 급작스러울지라도. 때론 장마처럼 영영 내릴 것 같이 여겨지더라도. 비가 내리고 그치고 다시 내리는 것이지, 비가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나락을 맛보았을지라도 엔리카는 그렇게 말해주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희망도 절망도 몰랐다지만, 비가 그치지 않았다는 당신의 삶은?
어쩌면 그것은 당신만의 나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레이피스에게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다만 짐작할 뿐이었다. 엔리카는 솔직했으나 사려 깊었다. 엇갈렸던 시선으로 레이피스를 잠시 그렇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단호한 태도는 연인 앞에서 한 수 접어두게 된다.
그리고 그에 앞서 엔리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푸슬푸슬하게 웃을 여유를 되찾았다.
“나또한 마찬가지였다고 말해도 될까요?”
엔리카는 찻잔을 놓고 레이피스가 얹은 손을 약간 틀어 깍지를 끼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른 손을 얹었다.
“당신이 나를 살아가게 해요.”
절망과 사랑을 같은 사람이 지니게 된다는 말의 의미를 알더라도 섣불리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당신을 생각하면 마냥 부정하기도 어려워진다. 당신으로 인해 기뻐지고 당신으로 있기에 버티게 되고 때로는 당신의 아픔에 슬퍼하게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공감을 넘어서 당신이 소중하기에.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를 얻었기에. 레이피스, 당신을 사랑하기에.
“그것이 삶의 보상이라면. 우리는 할 수 있을 거에요. 당신과 함께 많은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희망도 절망도 모른다던 당신이 희망을 알게 되었구나. 나 또한 마찬가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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