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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레이엔리 대립에유

2019.08.18 공개 전환으로 새로운 독자분들에게 드리는 공지.


>>>>대립입니다. 예상 가능하시겠죠? 예 비참입니다. <<<<


비참에서 연상될 수 있는 많은 소재가 담겨있습니다. 정신에 좋지 않고 심신에 좋지 않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배경 상황에 대한 설명이 미흡합니다. (아마) 궁금하신 점은 제게 물어주시거나 댓글로 달아주시면 답하겠습니다. 



0.

너는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엔리카 페 아르다. 그때는 절대 도망치면 안 돼.

 

우리는 서로를 겨누게 될 거야, 레이피스 팬케일. 그러니까 조심해... 약속이야.

 

1.

당신을 처음만난 순간을 기억한다. 당신이 기억하는 순간보다 조금 앞선 순간일 것이다. 내가 크리티아스의 시장 거리를 오빠와 한창 이야기 하며 걷고 있을 때 푸른 망토가 스친 때가 있었다. 유독 파란 잔상에 시선이 끌렸다.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검은 자락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날은 밝았고 주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가을의 바람을 맞은 듯 기묘한 한기를 느꼈다. 멍하니 있던 나를 오빠가 잡아끌었다. 나는 방금 전의 이상한 느낌을 뿌리치고 반대방향으로 오빠와 걸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생태학자로서 다니면서 다져진 생명력에 대한 특유의 직감이나 마법사의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미래에 대한 예지 비슷한 것.

 

돌이켜 생각해 보곤 한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알았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2.

엔리카는 도시 외곽으로 향하던 중 통상적이지 않은 곳으로 발걸음으로 옮기는 이를 발견했다. 엔리카는 그 사람을 주의 깊게 주시했다. 그 사람이 향하는 방향에 도시를 보호하는 마법의 핵심 마법진을 관리하는 곳이 있었다. 관리인들은 그런 옷차림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정확히 마법진 관리 시설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엔리카는 빠르게 따라 붙었다. 그녀가 렌하임 마법대학을 재학 중이던 시절에도 그런 학생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마법왕국에서 마법을 배운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가득차서 뭔가를 뒤엎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존의 연구를 뒤틀거나 위험한 것을 건드리곤 했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늦기 전에 말려야 했다.

그 사람을 따라서 통제구역에 들어가자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주요 시설을 건드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엔리카는 그 사람의 어깨를 짚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이봐요!”

그 사람이 고개를 들며 엔리카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유독 안광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초록빛이었다. 엔리카는 문득 섬짓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재차 말했다.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좁은 공간이었기에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 눈을 접으며 손을 입가에 가져가며 작게 쉿 소리를 내었다. 엔리카는 그제야 자신이 아까 조금 크게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작게 말했다.

여기 바닥에 이상한 게 있어서요.”

그가 손을 벌리며 바닥을 보여주었다. 뚝뚝 끊어진 선들이 마구잡이로 놓여있었다. 마법진 같아보였다. 그러나 물에 번진 글씨처럼 모호해서 그것만 보아서는 무엇을 위한 마법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엔리카는 자연히 의심을 담은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선량하게 웃었다.

저도 몰라요. 원래부터 있었어요.”

그는 결백하다는 듯 두 손을 벌렸다. 그의 말대로 손에는 마법 수식을 새기기 위한 어떤 도구도 들려있지 않았다.

마법진이 아무 곳에나 그려진 것이 신경 쓰여서 살피러 온 것뿐인데......”

그는 입을 비죽이며 푸념을 내뱉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 더 따지기도 뭣했다. 엔리카 자신이 섣부르게 마법 장치를 건드리는 것에 대한 위험을 유념하며 그를 쫓았듯 그 또한 방치된 마법진이 불러올 수 있는 문제를 알고 예방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을지도 몰랐다.

알았어요. 그럼 일단 여기서 나와서 얘기해요. 여기는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에요.”

, 그랬나요? 그건 몰랐네요.”

엔리카는 그를 잡아끌었다. 그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건물 성벽 외곽의 구석진 곳에서 대로까지, 엔리카는 그를 단단히 붙잡고 걸었다. 환하게 트인 대로까지 나오고 나서야 그를 놓았다. 햇살 아래에서 보자 그는 어둠속의 막연한 윤곽보다는 유순하게 보이는 상이었다. 나쁜 마음을 먹고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엔리카는 제대로 설명했다.

그곳은 통제 구역이에요. 이 왕국 전체를 보호하는 마법을 가동시키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크리티아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외지 출신이신가요?”

이런, 그랬군요. 맞아요.”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리카의 어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렇군요. 크리티아스에 그런 장소는 그리 많지 않아요. 도시 외곽의 중요해 보이는 건물이나, 왕궁, 마법대학 같은 곳에만 아무렇게나 드나들지 않으면 문제 될 일은 없을 거랍니다.”

그는 엔리카가 말해준 장소들을 작게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흘려듣지 않고 단단히 기억해 두려는 모습이었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계시군요. 혹시 크리티아스 출신인가요?”

맞아요.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랍니다!”

즉각 자부심이 가득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했다. 그러나 곧 풀렸다.

그렇다면 이곳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군요.”

, 이곳에 대해서 다른 궁금한 점이 있나요?”

많아요. 전부 처음 보는 것이거든요.”

그는 느슨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친절하고 예의바른 태도에 호의가 싹 텄다. 현지인으로서의 안내의 의무까지 더해져서 엔리카는 친철하게 말했다.

천천히 하나하나 말해줘도 좋아요.”

그럼 일단 가장 궁금한 게 있는데......”

그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저는 레이피스 팬케일이랍니다.”

, 레이피스는 자연스럽게도 물었다. ? 이건 크리티아스에 대한 질문이 아닌데? 엔리카는 눈을 잠시 깜박였다가 선선히 답했다.

저는 엔리카 페 아르다에요. 엔리카라고 부르면 된답니다.”

엔리카, 좋은 이름이군요.”

 

3.

당신은 항상 가늠하고 있었겠지. 처음 만난순간부터 말이야.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내가 그 계획에 걸림돌이 될 것인가,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그러니 처음의 접촉은 감시였을 테고, 그 순간에도 나를 죽여야 할지 말지 가늠하고 있었겠지. 아니라고 말하지 마. 그렇게 쉽게 아니라도 답하지 마.

당신은 이름을 물었지. 나는 답했어. 이름은, 내 이름은 나를 그 이후에도 추적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열쇠였겠지. 나는 이름을 너무 쉽게 내어주었어. 이름을 비롯한 많은 것을. 선의와 정보와 교류와 시간, 그리고 감정까지도. 나도 알아. 알고 있어. 당신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를 속이려고 대한 것은 아니겠지. 내가 내준 것을 당신도 내주었으니까. 이제는 당신을 제법 아니까. 그렇지만 말하지 마. 말하지 말아줘.

부디 나를 두 번 기만하진 말아줘, 레이피스.

 

4.

엔리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평소에 비하면 그리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유독 피곤했다. 가물가물하게 감기는 눈의 사이로 오늘 만났던 이가 떠올랐다. 레이피스라고 했다. 선명한 파란 머리칼에 연녹색 눈동자. 호의적이었고 사려 깊은 사람.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떠들다 보니 이야기하다보니까 그와는 겹치는 것도 많았다. 그 또한 마법사이며 생태학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마법사라고 답했으나 엔리카가 생태학자라는 것을 밝히자 그 또한 같다고 화답했다. 접점이 많으니 대화거리도 많았다. 그와 이야기 하는 건 재미있었다. 신나서 잔뜩 쏟아내는 바람에 지금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그는 여관에 머무는 대신 왕국의 문이 닫히기 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숲에서 머문다고 했다. 숲에서 지내는 것이 익숙하다며 걱정은 말라고 손사래 쳤다.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쉽다고 말했더니 그는 반색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다음에 만날 약속도 잡았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엔리카는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켰다.

엔리카. 안에 있어?”

오빠, 아이든의 목소리었다. 엔리카는 눈을 깜박여 맑게 하고 화답했다.

, 들어와도 돼.”

아이든이 문을 열고 문가에 섰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막 들어온 듯 정통 마법사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엔리카가 아이든의 차림새를 살펴보고 물었다.

집에 이제 왔어?”

저녁에 갑작스런 회의가 잡혀서 나갔다 온 것뿐이야.”

그래? 요즘 바쁘게 지내는 것 같아.”

너야말로 요즘 자주 나다니는 모양이더라. 종종 들릴 때 마다 없던데?”

아이든이 넌저시 생태학자의 업무를 꼬집을 때 그런 말을 썼다. 아이든은 엔리카가 생태학자의 길을 걷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그들은 그 일로 수어번 싸웠었다. 엔리카는 그냥 웃었다. 오늘밤 논쟁을 벌이긴 피곤해서 그냥 좋게 넘기고 싶었다. 평소의 말버릇과 겹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아이든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덧붙였다.

네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지. 이건 그것과 무관하게 하는 충고야. 요즘 전염병이 돈다더라. 한동안 외출을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전염병이라고?”

.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생기가 다 빠져서 시름시름 앓는다고 하더라. 한두 명도 아니고 벌써 몇 명이 쓰러졌어.”

아이든은 진지하게 말했다. 엔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심해서 다닐게.”

아이든의 충고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기 어려웠다.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였고 돌아섰다.

, 맞아.”

엔리카는 나가려는 아이든을 붙잡고 말했다.

오빠도 조심해. 왕국 밖의 숲에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기현상?”

. 숲이 죽어가고 있어.”

“......그런데?”

아이든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왜 큰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 하는 기색이었다. 엔리카는 아이든이 이해 할 수 있게 설명을 덧붙였다.

숲이 죽는다는 것은 숲을 이루는 나무와 풀, 균류, 동식물이 종류가 무엇이든 단체로 죽어나간다는 뜻이었어. ()가 다른 생물들까지 나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야. 자연적인 현상은 절대 아니고 우리는 마력과 관련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어. 만일 그렇다면 식물에게만 영향을 끼치지 않고 근처의 동물이나 몬스터, 토양, 공기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몰라.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아이든은 고개를 까닥였으나 다시 되물었다.

내가 숲을 지나갈 일은 없을 텐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그래도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악한 마력이 난데없이 나타났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고. 아니면 숲에서 가져온 재료들이 오빠의 연구에 이상을 발생시킬 수도 있잖아.”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내 연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내가 방책을 마련해둘게. 그리고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는 거지? 알겠어. 그렇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숲을 지나다닐 일이 더 많은 건 너니까 네가 더 조심해야겠네.”

엔리카는 자신이 그 현상을 조사하고 다니고 있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그 방면에서 전문가야. 최소한 오빠보다는.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5

풀이 발밑에서 바스라졌다. 고작 한번 스치는 것만으로도 조각조각 분해된다. 엔리카는 풀 조각을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건드리면 바로 부스러질 정도로 바싹 말라있었다. 열기에 차차 마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노랗게 변해야 했는데 죽은 잎들은 여전히 초록색 색소를 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 것일까. 엔리카는 말라버린 숲과 싱싱한 숲의 경계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곳의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수분? 아니, 좀 더...... 본질적인 것이.

먼 곳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싱싱한 잎들은 서로 부딪히며 물소리 같은 것을 내었지만 이곳에서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가벼운 바람이었지만 나뭇잎들은 그걸 버티지 못 하고 뚝뚝 떨어졌고 한없이 가볍게 바닥에 충돌하면서 깨진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황폐한 광경을 앞두기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되면서 마나를 기민하게 느끼게 된 신경이 이건 잘못된 것을 넘어 끔찍한 종류라고 속삭였다. 엔리카는 망설이다가 죽은 숲 속으로 걸어들었다. 다른 생태연구원들이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는 말라고 외쳤다. 엔리카는 알겠다고 답했으나 한발 한발 더 나아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습했다. 밖은 바싹 말랐는데? 엔리카는 입을 덮고 걸으며 천천히 생각을 이어나갔다. 만약, 그 무언가를 이 중앙으로 빨아들였다면, 그래서 이곳에 농도 짙게 들어차게 되었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밀집된 것은 어떻게 되었을까? 끝없이 이어지던 의문이 멈췄다. 안개가 걷히고 다른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숲이 검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파리가 녹아 검은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진다. 가지는 좀 더 점성을 가지고 느리게 흘러내린다. 그런 검은 물들이 고여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탁한 습기가 가득했다. 보통 이런 음습한 기운이 가득한 곳에서는 몬스터가 생기곤 하는데...... 엔리카는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시선에 무언가 걸렸다.

발치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본래는 토끼나 너구리정도 크기의 소동물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태가 잔뜩 일그러진 탓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움찔거리며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것은 엔리카를 발견하고 귀로 추정되는 부위를 바싹 세웠다. 엔리카는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물러났다. 그것은 바들바들 떨며 몸을 부풀렸다. 단순히 털을 세운 정도가 아니었다. 몸이 붕 뜨더니 하나의 묵직한 쇠뭉치로 변했고 꼬리가 길어지며 손잡이로 바뀌면서 조악한 형상의 손 망치가 되었다. 전신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엔리카는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방어 마법을 외웠다. 손 망치에 엔리카에게 달려들었다. 방어막이 쨍하는 소리를 내며 울렸다.

위험해요.”

누군가 엔리카를 뒤로 끌어당겼다. 레이피스였다. 그는 마법진을 허공에 띄웠다. 엔리카가 보지 못 한 형식이었다. 정통 마법사라면 마법진을 그런 식으로 그리지 않는다. 레이피스가 실수한 줄 알고 엔리카가 다른 마법을 시전하려 들었다. 그러나 레이피스의 마법은 제대로 작동해 마나로 짜인 화살이 튀어나가 그것에 적중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우그러지고 철 조각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육중한 쇳덩어리가 검고 진득한 물에 빠졌고 표면이 출렁거리다가 잠잠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혼란스러워하는 엔리카와는 대조적으로 레이피스는 담담하게 답했다.

이 현상이 벌어진 곳의 생명체들은 죽고 무생물이 되어버려요. 지금은 무기가 필요한지 무기로 변해버리고 있고요. 죽기직전 마지막에 남은 감정에 지배당해서 오로지 그것에만 의해 움직이고요. 그나저나 놀라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엔리카는 손을 잡았다. 낯선 장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안도감이 천천히 가라앉고 문득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눈 앞의 사람은 어둠에 죽은 숲과 지나치게 잘 어울린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싸한 한기와 답답한 공기, 유독 짙고 어두운 그림자. 본래부터 이런 곳에 살았던 것처럼, 이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잡아챘다.

레이피스씨, 우리가 현상을 최초로 발견하고 찾아 왔는데 어떻게 내부에 있었던 건가요?”

단순히 느낌 때문에 붙잡은 건 아니었다. 사소하지만 신경쓰일 수 밖에 없는 점들이 그에게 있었다. 레이피스가 가는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숲에서 지낸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들이 발견하고 찾아오는 것보다 빠를 수밖에 없죠.”

이 숲에서 계속 이 현상만 주시했나요?”

그렇죠. 나 또한 생태학자니까요.”

흠잡을 데 없는 답변이었다. 그렇다고 수긍하고 옷을 놓기에는 수상쩍은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엔리카는 바싹 다가가서 말했다.

현상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그렇게 보이나요? 나도 계속 이 현상을 쫓고 있었거든요.

나도 이 현상에 대해 내가 속해있는 생태학자들의 단체로부터 어느 정도 들은 것은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알고 있는 정보는 몰랐지만 다른 것을 말해주었지요. 패턴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쫓을 수가 없다는 것. 당신은 어떻게 알고 여기로 온 거에요? 또 무엇으로 이런 정보를 얻었나요?”

엔리카.”

그는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쉿 하고 입가에 손을 가져다 세웠다. 이상하게도 그가 그럴 때면 섣불리 묻기가 어려워졌다.

내 밑천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주면 안 될까요?”

엔리카는 결국 더 캐묻지 못 했다. 모두 타당한 말이었다. 고작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넘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그건 그렇지만....... 이번에는 순전한 아쉬움으로 넌저시 말했다.

만약 조사가 길어지고 이 현상을 같이 연구하게 되는 날이 오면 혹시 그때는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레이피스는 잠깐의 간격을 두고 답했다. 레이피스가 예의상, 아무렇게나 답한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고민하고 답한 것 같이 느껴졌다. 작은 만족감을 쥐고 엔리카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6

당신은 비밀이 많았어. 베일에 감춰진 모습에 설레었던 것은 아니었어. 상관없었을 뿐이야. 당신이 어디에서 왔던, 어떤 사람이었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 적어도 그땐 그랬어. 나는 우리가 숲을 걷는 순간이 그저 행복했어. 당신과 보낸 시간은 여리게 밀려와서는 나를 적시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올라 나를 잠기게 만들었어.

앞으로의 미래를 지배할 것 같은 확신을 당신도 알까?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앉았던 순간 기억해? 너무 이르게 깨어버렸는데 숲의 새벽은 서늘했지. 꺼져가는 모닥불 불씨를 살려보았는데 쉽게 따뜻해지지는 않았지. 그래서 다가서 앉았잖아. 처음에는 당신 몸이 차가웠던 걸로 기억해.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아. 정작 그때쯤에는 보온에 집중 할 수 없었거든.

살갗으로 전해져오는 존재감이 가득했어. 하나의 세상의 채워진 느낌이 들었지. 당신이 말을 걸었는데 목이 울리는 느낌이 간지럽게 전해져왔고, 그 목소리에 .희미하게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눈을 감았는데 당신의 감각이 오히려 선명해졌지. 추위를 달래려고 시작했는데 정작 내가 열에 들떠 얼굴이 붉어졌을까봐 고개를 약간 숙였어. 내가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당신은 생각했을까?

레이피스. 당신 앞에서는 행동이 조심스러워졌어. 나는 당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내가 더 캐물으면 당신은 곤란해 할 것 같았고, 싫어할 것 같았고, 그 다음에는 미련 없이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심장이 서늘해졌지. 그래서 질문들을 입속으로만 달싹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어버렸지. 그런 것을 묻지 않고 식물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모든 것을 잊고 하루 더 행복 할 수 있었어. 다만 죽어가는 숲에 대한 얘기는 제외하고. 검게 죽은 숲은 우리가 정작 조사하는 대상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질문을 품었으나 묻지 않았고 나는 당신은 답을 쥐고 있는 것 같았으나 답해주지 않았지. 그래서 연구는 진전이 없었지만 당신은 답답해하지 않았지. 나도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어. 현상은 심각해졌고 여러 곳에서 발발했으나 속절없이 기다렸지.

참 신기해. 마음의 걸림돌 하나가 그렇게 수많은 죽음을 간단하게 방관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

 

7

다리가 풀썩 꺾였다. 어찌된 일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병을 앓다가 일어난 것처럼.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병에 걸린 적은 없었다. 엔리카는 억지로 일어나 걸으려고 했고 눈앞이 빙글 돌았다. 나무 기둥을 짚고 겨우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엔리카? 레이피스가 돌아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엔리카는 괜찮다고 답하며 짚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걸어가는 그 간단한 일이 불가능했다. 한 발자국 만에 엔리카는 무너졌고 세상이 기울어졌다.

엔리카!”

온전히 넘어지기 전에 레이피스가 엔리카를 붙잡았다. 엔리카는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항상 건강했던 엔리카는 몸 상태가 이렇게 추락했던 적이 없었기도 했다. 속절없이 떨리는 손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엔리카. 진정하고 당신은 마을로 돌아가요. 이런 곳을 너무 많이 돌아다녔나 봐요.”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붙잡고 찬찬히 달래듯 말했다. 엔리카는 고개를 저었고 그의 옷을 꽉 쥐고 몸을 일으켜보려고 애썼다. 그러자 레이피스가 손을 뻗어 엔리카의 눈가를 스쳤다.

이곳 조사는 제게 맡을게요. 마저 둘러보고 갈 테니 먼저 가요.”

눈앞이 검게 흐려졌고 의식이 훅 꺼졌다.

 

일어났어?”

누군가가 눈앞에 있었다. 한참 생각하다가 목소리의 주인이 떠올랐다. 생태연구의 선임 단원이었다.

로제...... 선배?”

그래, 나야. 알아보겠어? 몸은 좀 괜찮고?”

몸이 어땠었지? 엔리카는 흐린 눈을 깜박거리며 몸을 일으켜보려다가 휘청거렸다. 로제는 이크, 하더니 엔리카를 부축했고 다시 눕혔다.

너 나흘간이나 그 상태였거든. 아직 한-참 안정이 필요해 보니까 잠자코 누워있어.”

엔리카는 흐린 눈으로 가만히 위만 보았다. 로제는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무언가 말을 할 정도로 정신이 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엔리카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디죠?”

임시 막사. 밖에 눕혀두기에는 너희 상태가 꽤 안 좋아보여서 하나 점거했어. 원 주인이 오면 그때 양해를 구해보지 뭐. 설마 병자들을 두고 내쫓기야 하겠냐? , 그리고 크리티아스에 사람을 보냈으니까 곧 올 거야.”

로제는 특유의 말버릇으로 시원시원하게 말했지만 내용은 꽤 심상치 않아보였다.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으나 엔리카는 겨우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너희요?”

그래. 생태 단원들이 단체로 다 뻗었잖아.”

그게 무슨, 소리에요?”

로제는 일어나서 앞에서 비켜주었다. 엔리카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막사 이곳저곳에 모포나 천을 깔고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이라 보이게는 한낮이어서 천에 환하게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몇몇 거동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들은 그들을 간호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여전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라? 몰라?”

로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앉았다.

나도 리프레에서 방금 온 거라서 잘 몰라. 너희는 죽어가는 숲을 연구 중이었지? 각자 흩어져서 돌아봤다고 했는데 하나 둘 상태가 이상해진 채로 돌아왔댔어.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싹 연락 돌려서 파견 나간 사람들 전부 귀환하라고 했지. 나도 그래서 오게 되었고. 다른 지역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괜찮아서 대부분 제 발로 잘 왔는데 죽은 숲 주변에서 진을 치던 녀석들은 전부 쓰러지기 직전이더라. 그래서 거기서 끌고 나와서 여기로 모았지.”

엔리카는 자신이 들은 것을 천천히 되새기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자신의 급격히 몸이 쇠약해져서 쓰러진 것은 기억이 났다. 이유는 모른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단체로 같은 증상이 일어났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인거지? 정말 숲이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 것일까?

지켜보던 로제가 흠, 소리를 내다가 담요를 확 끌어당겨 엔리카의 얼굴 위에 덮어버렸다.

너 또 뭐 고민하고 있지?”

로제 선배.......”

키득거리는 소리가 담요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무도 안 죽었고, 다들 너보다는 상태가 나아. 연락이 안 되는 사람들은 멀쩡한 애들이 숲을 뒤져보는 중이고. 이곳은 지형이 까다롭지 않아서 금방 다 둘러볼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일단 쉬고 있어.”

로제가 담요를 내려주었다. 엔리카는 한숨을 쉬고 고르게 누웠다. 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사람을 보러가려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엔리카는 퍼뜩 그가 떠올랐다.

레이피스.”

....... 그게 뭔데?”

엔리카는 로제의 팔을 붙잡았다.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레이피스, 그러니까 저랑, 저와 함께하던 사람이요. 보지 못 했나요?”

그 사람 이름이 레이피스야? 너를 누가 데려다주기는 했어. 파란 머리카락 맞지?”

맞아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요?”

? 갔는데?”

갔다고? 엔리카의 손이 스륵 풀렸다. 로제는 얘가 또 벌떡 일어날까봐 잔뜩 살피며 말했다.

그렇다니까. 크리티아스로 향하던 중이였던 것 같은데 도중에 우리와 마주쳤거든. 우리가 너를 발견하고 알아봤거든. 너는 우리 생태 연구 단원 소속이고 우리가 치료가 필요한 인원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고 널 데려왔어. 그리고 그 사람은 갔지.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더라. 그 사람은 완전히 멀쩡해 보여.”

먼저 마을에 가 있으라고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저 조사하고 가겠다고 했다. 올 것이다. 엔리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엔리카가 진정된 것처럼 보이자 로제는 엔리카의 담요를 정리해주고 일어났다.

 

8

그럴 줄 알았어.”

아이든은 엔리카를 보고 대뜸 그렇게 말했다. 엔리카는 억울했지만 결론적으로 아프게 된 것은 자신이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이든은 더 뭐라고 하는 대신 엔리카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집에서 일단 쉬고 있어. 의사를 불러 볼 텐데, 요즘 부르는 사람이 많아서 여기까지 와주길 기대하기는 어려워. 그렇지만 이미 의사들 사이에서도 약은 떨어졌고 하는 조언은 똑같대. 원인은 모르겠고 일단 기력이 쇠해졌으니까 잘 먹이고 푹 쉬게 하라고. 그건 가족들이 충분히 해줄 수 있으니까, 집에서 그러고 있으면서 상태를 지켜보자.”

엔리카도 모르는 자신의 상태를 아이든은 잘 알고 있는 어투였다. 엔리카는 되물었다.

이게 무슨 증상인 줄 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거잖아. 크리티아스에서 떠도는 병.”

아이든은 태연하게 답했다. 엔리카는 의아해졌다.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건 크리티아스에서 걸린 게 아니야.”

아이든은 엔리카를 훑어보았다.

맞는데. 증상이 같아.”

아이든은 확신 앞에 자신의 주장을 물리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 순순히 믿기는 어려웠으나 어렵사리 발걸음을 했다는 의사도 척보고 아이든과 같은 말을 했다. 생태 단원들은 크리티아스의 환자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알고 리프레로 이송해갔다. 크리티아스로 온 건 이쪽에 집이 있는 엔리카 뿐이었고 때문에 그들에게 다시 물어보며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해결되지 의문을 붙잡은 나날이 착실히 흘러갔다.

엔리카는 쉬며 천천히 나아졌지만 크리티아스 전체적으로 환자는 늘어났다. 그리고 왕국 내부에 몬스터가 돌기 시작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경비병들과 몬스터들 간의 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엔리카는 창문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몬스터들은 숲에서 보던 것과 닮았다. 무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감정을 따라 흉폭하게 날뛴다. 상처입히기에 가장 적합한 모양새를 취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가족들은 집에 방어 마법을 단단히 쳤다. 그러나 집안에 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 가족은 잘 알려진 마법사들이었고 시국이 위태로우니 많은 마법사들이 필요했다. 가족들은 여기저기의 마법을 설치하고 보완하는 일을 하고 돌아왔다.

병이 심해지면 그 사람이 몬스터로 변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한다. 그런 것이 가능할리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을 원인으로 몰아갈 수도 있으니 처신을 조심하거라.”

어머니는 외출을 다녀올 때마다 점점 흉흉해지는 상황을 간략하게 전달해주었다. 엔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아이든은 그 자리에서 풀지 못한 연구 주제를 집안으로 끌고 돌아왔다.

도시 곳곳에서 마법진 같은 것이 발견되고 있어. 누가 무슨 속셈으로 그려 놓은 건지 모르겠어. 이게 원인일지도 모르겠는데 다들 바빠서 이것을 조사할 인력이 부족해.”

어떻게 생겼어?”

아이든은 종이를 한 장 건네주었다. 엔리카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잘못 그린 것 같은 비정형적인 형식과 의도적으로 완성을 미룬 것처럼 뚝뚝 끊어둔 일부 선.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 그려져 있었다.

 

홀로 침상에 앉아 있었던 엔리카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단순히 비밀을 파헤치지 않는 것과 알고 있는 사실을 끼워 맞추지 않는 것은 다르다. 알아보려 하지 않는 것과 아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진실의 거리만큼 가까워진 의혹이 상자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열어보라고 아우성쳤다. 닫힌 상자를 쥐고 있는 건 외면과 부정과 불안한 마음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은 딱 하나였다. 상자를 열어보는 것.

엔리카는 어느 새벽 깊은 숨을 내쉬었다.

 

9

오랜만이에요, 엔리카.”

엔리카는 냉담하게 마음을 휘감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와 마주하니 그 결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간 어디 있다가 이제 왔어요!”

그의 앞에 서는 것은 한달음으로 이뤄졌다. 숲을 세 번은 전부 돌고도 남을 시간동안 그는 오지 않았다. 숲 어딘가에 쓰러져서 방치되었을까봐, 오는 길에 몬스터에게 당했을까봐 애간장이 탔다. 안심하기에는 요즘 크리티아스에는 너무 많은 부고가 날아다닌다. 걱정 앞에 약해졌고 솔직해졌다. 엔리카는 한참을 레이피스를 붙잡고 서 있었다. 레이피스는 피로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엔리카는 거리를 바싹 마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옆의 사람이 돌아왔다는 안도에 마냥 젖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 거리가 지금은 조용하지만 많은 피와 눈물이 이미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 감상에 빠져있을 수가 없어서 엔리카는 말을 꺼냈다.

레이피스, 그거 아나요? 크리티아스에서 병이 돌고 있어요.”

이런....... 그렇군요.”

레이피스가 적막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엔리카는 그가 자신과 같은 거리를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몬스터가 출현하고 있고요.”

엔리카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크게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아는 사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른 이유라면? 생각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고 엔리카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우리가 본 죽은 숲의 몬스터들을 기억해요? 당신이 내게 알려주었던 것들이요. 생명체들이 죽고 죽기직전 마지막에 남은 감정에 지배당해서 오로지 그것에만 의해 움직이는 몬스터들이요.”

당신 말대로 내가 알려주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나요.”

당신이 원인이지요?”

엔리카는 단도직입적으로 던졌다. 서로는 서로를 보았고 신경이 팽팽하게 세워졌다. 레이피스는 방어적으로 나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왜냐하면.”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이유는 수어가지였다. 그러나 엔리카는 어느 것도 확신은 없었다. 섣불리 빼어든 카드가 잘못 되었을까봐, 그를 상처 입히기만 하고 끝날까봐 긴장되었다.

당신이 여기에 오고 모든 일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내가 과한 망상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줘요, 레이피스. 당신은 항상 대답을 피했어요. 당신이 알고 있는걸 알려줘요.”

“...... 그렇다면 이번에는 가능한 선에서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 봐요.”

답해줄 건가요?”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엔리카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는 크리티아스에 도는 병과 죽어가는 숲의 현상이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레이피스가 계속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죽어가는 숲을 조사하다가 나는 쓰러졌지요. 숲을 조사하던 많은 생태단원이 저와 같은 상태에 빠졌다고 들었고요. 그런데 의사는 내가 크리티아스에 도는 병에 걸렸다고 진단했죠. 실제로 증상이 같았나 봐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곳에 있던 모든 나무와 풀들이 죽어갔듯 그 장소에 머물던 나또한 죽어갔다고. 크리티아스의 사람들도 죽어가는 중이라고. 그 과정은 충분히 병으로 보이겠죠.

원인을 대보라면 나는 할 수 없어요. 모르니까. 다만 유사한 현상들을 보고 원인이 같은거라 유추하는 것이지요. 다른 현상을 대보죠. 두 번째 현상은 무기물로 변하는 몬스터에요. 나는 동물이 무기 형태의 몬스터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했죠. 당신도 같이 보았으니 그건 부정하지 못 하겠죠. 그리고 내가 크리티아스에 몬스터가 출현한다고 말했죠? 여기에도 똑같이 무기 형태의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병을 앓던 사람들이 몬스터가 되어버린다는 소문도 있고요. 그저 헛소문일 수도 있겠지만 유사한 현상을 이미 보았으니 넘기기 힘들지요.”

근거가 빈약했으나 엔리카는 당당하게 밀어붙였다. 레이피스는 엔리카의 말을 끊어내지 않았으며 잠자코 들었다.

이 모든 현상이 시작되었을 즘에 당신이 등장했어요. 당신은 독특한 존재지요. 생태 단원들이 거의 쓰러졌는데 당신은 멀쩡하게 숲을 돌아다녔지요. 그리고 다시 숲으로 향했다고 들었어요. 이 현상에서 유독 당신만은 예외에요. 그리고 다른 이들이 알지 못 하는 현상의 세부사항을 알고 있었고요. 그러나 우리에게 공유해주지는 않았죠?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일에 타격을 받지 않으며 일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고 있으며 피해를 방관하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 같아요? 나라도 당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의심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잖아요! 당신은 해명을 해야 해요.”

엔리카는 이어서 마법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죽어가는 숲이 발발하는 현상에 가장 먼저 레이피스가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원인으로 의심되는 것에는 항상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레이피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조용히 그는 사과의 말을 건넸었다.

미안해요, 엔리카.”

엔리카의 눈이 매서워졌다. 뭐라고 쏘아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당신의 추측과 말이 다 옳아요. 다만 딱 하나 어긋난 것이 있어요. 그 현상에서 내가 예외인 것은 아니거든요.”

레이피스가 파리한 낯으로 웃으며 속삭였다.

나또한 그 병에 걸린 것 같아요.”

엔리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의심을 담고 굴러가던 머리가 하얗게 질린 채 멈췄다. 수척해진 그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며칠 새 더 마른 몸, 떨리는 손, 병색이 드리운 얼굴. 왜 아까 알아차리지 못 했을까? 그를 추궁하기에 급급해서! 속에 데는 것 같았다. 레이피스는 비틀거리며 걸었고 엔리카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운이 좋게 내게서는 현상이 유예되었나 봐요.”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숲을 돌아다녔어요! 게다가 이 상태로 대체 어찌 걸었고 내 대화를 받고 있었어요?”

당신이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보여서요.”

그래도 이런 일이 있었으면 먼저 말했어야죠.”

엔리카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속이 상해 괜한 타박을 하게 되었다. 그는 간신히 미소를 떠올렸으나 힘겨운지 금세 흐려졌다. 꺼져가는 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부탁이 있어요, 엔리카.”

“......말해요.”

여기 사정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괜찮다면, 약 좀 구해다 줄 수 있나요?”

고통을 참아내는 기색이 그의 표정에 스쳤다. 엔리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절대 무리하지 말고요. 약을 구해서 금방 돌아올게요.”

 

10

엔리카는 그가 머물 여관을 잡아주고 갔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자 레이피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가셨다. 엔리카가 성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다음, 그는 망토를 집어 걸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병들어 보이는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움직임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는 불안한 웅성거림이 떠도는 시장을 태연하게 걸었다. 레이피스가 도착한 곳은 맨 처음 엔리카를 만났던 곳이었다. 반쯤 지워진 마법진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레이피스는 엔리카가 주기적으로 이 마법진의 상태를 확인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까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레이피스는 검지 손가락을 마법진 위에 놓았고 내리 그었다. 손끝에서 검고 날카로운 마력이 튀어나와 돌바닥을 파고들었다. 다시 완벽한 원이 그려졌고 선들이 원을 가로지르며 공간을 만들었고 그 안을 매우는 자잘한 문양들이 생겨났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그는 느리게 손을 떼어 마법진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미련 없이 일어났고 도시 한복판으로 나왔다. 레이피스는 건조한 눈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쇠퇴해가는 왕국이었는데도 아직은 살아있다는 듯 현란한 조명들이 각지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레이피스는 손을 심장높이로 들어올렸다. 피부에서 검은 기운이 스물스물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두었고, 꽉 주먹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왕국 곳곳에 설치된 마법진에서 검고 굵은 기둥이 튀어나왔고 휘어지며 왕국 내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 형상은 마치 검은 손아귀가 심장을 움켜쥔 것만 같았다.

 

11

걱정이 심장을 휘감았으나 걷다보니 조금씩 진정되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 아직 가망이 있었고 엔리카는 그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원인도 병의 이름도, 이것이 병이 맞는지 조차 명확하게 몰랐으나 의원들이 처방해주는 약에는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효과가 분명 있었다. 기운을 북돋아줄 때 쓰는 약초였는데 의원에게서나 시장에서는 이미 동났다. 따라서 엔리카가 직접 캐러가야 했다. 크리티아스 근방의 숲은 죽은지 오래여서 멀쩡한 숲에 다다를 때까지 엔리카는 오래 걸었다. 한참 만에 푸른 숲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숲을 헤집으며 싱싱한 것들을 골라 조심스럽게 캐어내었다. 얼추 모으자 약초들을 가방에 정돈하여 넣었다. 이번에 도는 전염병에는 바짝 말린 것 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약초가 더 잘 듣는다고 들었다. 되도록 풀이 마르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걸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엔리카가 성문이 있던 곳에 다다랐는데 크리티아스의 입구가 사라져 있었다. 마치 세계를 접어버린 듯이, 흔적조차 없이.

이게 무슨 일이지. 엔리카는 뻥 뚤린 성문을 지나 멍하니 걸었다. 소리가 귓가에서 미끄러졌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밤이면 은은하게 빛을 뿌리던 마법등이 깨져서 바닥에 나뒹굴고, 파편들은 남아있는 마력으로 요란하게 깜박였다.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눈앞의 광경이 엔리카가 알아볼 수 있도록 바뀌지는 않았다.

엔리카는 이런 곳에 놓여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장소 자체는 익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눈에 닿는 모든 것이 반파되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며칠 사이에 폐허가 될 수도 있던가? 어떤 전투가 벌어져야 장소가 이리 변하게 될까. 엔리카는 일단 집으로 향했다. 길의 지표로 삼을만한 조형물들은 죄다 무너져 있어 찾아가기 어려웠다. 알던 곳이지만 다른 풍경과 청각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지나친 적막이 어우러져서 그저 꿈같았다. 현실감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집에 들어간 엔리카를 맞은 건 무기 형태의 몬스터였다. 딱 가족 인원과 같은 개수였다.

엔리카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악몽 속에서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정든 곳이 단숨에 지옥으로 변하는 광경에는 놓여본 적 없었다. 그곳에 시신은 없었다. 시체 생기면 남은 생명력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히고 무기로 뒤바뀌며 그자의 군단이 된다. 무생물은 숨을 쉬지 않는다. 따라서 부유하는 무기들은 어떤 인기척도 내지 않았지만 엔리카를 추격하며 간헐적으로 쇳소리를 내었다. 모두 본래 사람이었을 것이다. 엔리카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알고 있었다. 마주한 현실은 어째서 이제야 인정했냐고 되물으면서 끔찍한 후회를 끌고 왔다. 엔리카는 심장께를 움켜쥐고 무너지며 그의 이름을 내질렀다.

 

레이피스 팬케일!

 

12

레이피스는 쓰러지듯 성 밖으로 나왔다. 성벽의 작은 문 케르카포르타를 통해서. 이번 일은 그에게도 꽤 버거운 일이었다. 그동안 거두어들인 것으로는 부족해서 어둠의 힘을 끌어다 썼더니 몸이 반쯤 잠식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었군요.”

서늘한 음성이 꽂혔다. 엔리카는 자신에게서 이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줄 몰랐다. 레이피스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보지 않아도 아는 기색이었다.

내가 이 모습을 보고도 당신에게 해명을 요구해야 할까요?”

숲에 뿌렸던 재앙을 스스로 몸에 달고서 망가진 크리티아스에서 유일하게 몸을 보존하여 나온 사람. 단순한 희생자로 봐주기에는 의문과 거짓말이 너무 길게 늘어졌다.

설마 아직도 기대를 걸고 있어요?”

아니요.”

엔리카는 칼같이 끊었다. 레이피스는 웃었다.

맞아요, 전부 내가 한 일이죠. 제 작품이에요. 내가 숲을 죽였고, 저것들을 만들었고 이곳을 파괴했죠.”

엔리카는 기이하게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나요?”

처음부터지요. 나는 생태학자도 마법사도 아닌 군단장으로서 크리티아스에 왔으니까요.”

레이피스는 손을 펼쳤고 엉망진창이 된 크리티아스를 훑었다.

대체 왜 그랬나요?”

내가 군단장이라는 것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요?”

엔리카는 필요한 말 이외에는 일체 입을 닫은 채 그저 레이피스를 주시했다. 레이피스는 그 시선에 재미있다는 듯 또 웃었고 엔리카가 원하는 대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 마법은 내게서 대가를 가져가지 않지요. 당신이나 이곳의 사람들처럼 반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난 어떻게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요?”

마력으로 싸인 화살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엔리카는 마법에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았다. 그의 질문에 화답해주지도 않았다. 싸늘한 청중을 앞에 두고도 레이피스는 주눅드는 기색이 없었다.

간단해요. 내 마법은 대가가 무겁지만 그것을 치르는 것은 내가 아니거든요. 나는 다른 이들의 것을 취해요. 주로 생명력을 가져오죠. 숲에서, 온갖 살아있는 것에서, 여기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당신에게서도 가져왔지요. 그때 당신에게서 가져간 생명력은 아주 요긴하게 쓰였어요. 이 감사를 어찌 표현해야 할까.”

이해했어요.”

엔리카의 입에서 질문이 아닌 답변이 드디어 떨어졌다. 무미건조해보였으나 혐오의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하지만 원리를 이해했다고 당신의 행위를 이해한 건 아니에요.”

이런, 엔리카. 당신이 나를 이해해보려고 했어요?”

레이피스는 어둠에 잠식된 몸을 일으켰다. 검은 흐름이 넘실거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표정에 두려움이 떠올랐으나 엔리카는 빠르게 끌어내렸다.

당신은 나를 결코 이해 못 해요. 본래 있을 수도 없는 존재이나 타인의 생명으로 내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나를, 수없는 강탈로 이뤄지는 내 삶을 당신이, 티끌만큼이라도 이해하겠어요?”

아니요. 이해 못 하죠.”

엔리카는 간단하게 답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은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하니까.”

더 이상 당신에게 쏟을 수 있는 이해가 없고 노력이 없고 감정이 없어서. 난 이제 아무것도 없고 내 안의 모든 것이 죽어버려서. 엔리카는 가족이었던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그 잔해 앞에 섰을 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

심장에 칼을 긋는 감각을 느끼며 고한다. 안녕 내 사랑.

스산한 사람이 불었다. 두 사람의 겉옷이 팔락거렸다. 엔리카는 무기를 들었다. 레이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상대하려고요?”

나는 마법왕국 크리티아스의 마법사에요.”

크리티아스는 반마력으로 번성했지요. 반마력을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내가 전부 망가뜨린 것이 보이지 않나요?”

엔리카는 마법을 터뜨렸다. 돌벽이 후드득 무너져 내렸다.

내가 언제 반마력이 없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 적 있나요?”

레이피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면처럼 벗겨지고 지친 얼굴이 드러났다.

나를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나요?”

엔리카는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한 쪽 팔을 뻗으면서 망가진 크리티아스를 가리켰고 단어 하나하나를 짓누르듯이 말했다.

"내 나라를 돌려내기 전까지는 보낼 수 없어요."

레이피스는 피곤에 절은 얼굴로 바라보다가 눈을 꾹 깜빡였다. 눈물 대신 검붉은 게 맺혔다가 흩날렸다. , 정말 같은 사람은 아니구나. 망연한 깨달음이 찾아왔고 엔리카는 지팡이를 꼭 쥐었다.

 

13

레이피스의 마법에 당한 생명체들은 무생물형태의 몬스터가 된다고 했다. 마지막에 느낀 감정에 사로 잡혀 오로지 그것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되고. 엔리카는 어쩌면 자신이 벌써 그리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순수한 분노에 사로잡혀서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고려할 수 없었다. 공격마법이 얼마나 거칠게 상대를 강타하는지, 주변의 무엇이 무너져 가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냉철하게 남아있는 이성은 마력을 분배하고 마법 술식을 계산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다른 것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무기가 된 것이 아니면 뭘까?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다. 교전이 멈췄다. 엔리카는 숨을 몰아쉬었다.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으나 아직 서 있을 수는 있었다. 반면에 레이피스는 쓰러져있었다. 거센 호흡에 따라 몸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레이피스는 스스로를 깎아내어 전투에 임했다. 끌어다 쓸 생명력이 동난 탓이었다.

엔리카는 그가 입가에서 검은 피를 흘리는 것을 발견했다. 천천히 그를 향해 걸으며 반사적으로 반격하고 한없이 계산을 반복하던 정신 상태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엔리카는 전투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군단장이었고 막대한 힘을 다루었다. 그럼에도 승리했다.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희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를 이겼다 한들 무엇이 기쁠까?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지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엔리카는 충동에 휩싸여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허공에서 딱 멈췄다.

분노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다른 감정들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제각각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었고 당신이 소중했었어. 당신과 함께 보낸 시간들은 빛이 났었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한들 그 순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 지금도 나는 그 당시를 그릴 수 있잖아. 엔리카는 그만하라고 속으로 외쳤다.

레이피스는 새된 숨을 내쉬며 작게 조근거렸다.

나를 살려놓은 숲이 어떻게 되는지 보지 않았나요.”

속이 미어졌다. 왜 당신은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살려달라고 빌면 나는 다시 어찌하지 못 할 텐데. 엔리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재촉했다.

어서요.”

엔리카는 지팡이를 내리꽂았다.

 

14

발밑의 돌이 부스러졌다. 본래 건물의 일부였을 그것은 딛는 대로 뽀얀 먼지를 일으켰다. 발걸음마다 감정이 길게 눌러 붙었다. 한발에 후회와, 한발에 서글픔과, 한발에 회한과, 한발에 서러움과, 한발에 죄책감과....... 버리리라 다짐했던 모든 것들이 피어오른다. 잡초처럼 제멋대로 살아난다. 그런데 분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차라리 그것에 미쳐 날뛰기를 빌었으나 그 상태는 다시 오지 않았다.

엔리카는 폐허를 빙 돌았다. 더 이상 몬스터를 상대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비어있는 입구에서 한 도시와 그 사람들에 대한 추모를 마음으로 간략하게 진행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날수록 엔리카는 그것이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되리란 것 직감했다.

엔리카는 레이피스와 전투를 벌이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는 레이피스가 누워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지팡이를 뽑아내었다. 날카로운 마력을 휘감았더니 땅까지 파고들었다. 만약 심장을 찔렀으면 분명 관통했을 것이었다. 빗겨나가 말끔하게 구멍 난 망토 자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를 왜 살려두었나요?”

텅 빈 눈이 허공을 향해있었다. 엔리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는 자연에서 필요한 만큼 취하면서 살아가지요. 누군가는 목재를, 누군가는 터전을, 누군가는 식량을.”

레이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쳐서 죽음을 원했나요? 엔리카도 너무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메마른 목소리로나마 말했다.

지나친 추구는 언제나 재앙을 불러왔지만 현명한 이들은 적당히 취하는 방법을 알아내었죠.”

그가 허공을 보던 눈을 스르르 움직여 엔리카에게 보냈다.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보았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엔리카는 누워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요. 레이피스.”

그가 한참 후에 멀쩡한 손을 내밀고 엔리카가 그를 끌어당겨 앉혔다. 레이피스의 어깨에 턱을 얹고 눈을 감고 엔리카는 속삭였다.

좀 더 살아봐요......”

내가 당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거대한 재앙 같은 당신을, 수많은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당신을, 어쩌면 당신을 쫓을 악의들을, 그리고 언젠간 당신을 향해 고개를 들 내 안의 원망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엔리카는 그를 놓을 수 없음을 알았다. 이것이 선의든, 심성이 무른 것이든. 레이피스가 툭 고개를 기대었다. 엔리카는 그런 그를 감싸 안았다. 황량하게 무너진 폐허에서 오직 둘이 남아 서로를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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