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8 공개 전환으로 새로운 독자분들에게 드리는 공지.
>>>>이건 정말 각잡고 비참 보고 싶어요! 에서 시작해서 쓴 글입니다. <<<<
비참에서 연상될 수 있는 많은 소재가 담겨있습니다. 정신에 좋지 않고 심신에 좋지 않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전 분명 경고 했어요. 경고 했다고요.
배경 상황에 대한 설명이 미흡합니다. (아마) 궁금하신 점은 제게 물어주시거나 댓글로 달아주시면 답하겠습니다.
권장하는 배경 음악
9
“마법사 언니.”
밥먹다 말고 소녀는 엔리카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은 피난민 소녀였다. 호기심을 풀어주는 엔리카를 곧잘 따르곤 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볼 때가 많았는데 지금 엔리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하였다. 엔리카는 암울한 표정에서 미소를 끌어올렸다. 오로지 습관으로 인해 소녀에게 웃어보였다.
“왜 그러니?”
“언니 눈이 보라색이야.”
아이는 수저를 그릇에 놓고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켰다. 엔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매만졌다.
“내 눈은 원래 보라색이었어.”
엔리카는 소녀가 그동안 잘 못 보았거나 말이 잠시 잘 못 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단호하게 재차 말했다. 시선은 집요하게 엔리카의 눈에 따라 붙고 있었다.
“아니, 조금 달라. 지금 연보라색이야. 그리고 반짝반짝 빛이 나.”
소녀가 장신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엔리카는 그제야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거울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피난도중 자리 잡은 야영지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엔리카를 소녀는 계속 바라보다가 “아, 원래대로 돌아왔다.” 라고 말하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엔리카는 석연찮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10
피난민들 중에서는 무기를 잡았던 자들도 있었다. 엔리카가 마법을 빌려주었듯, 그들은 무력을 빌려주었고 피난민들에게 여러 가지 물품을 지원받았다. 그들은 행렬의 앞뒤에 서서 피난민들을 호위했다. 그리고 그 외침은 그들의 것이었다.
“물러서!”
갑작스러운 고함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무기를 잡은 자들은 앞으로 달려 나갔고 싸울 줄 모르는 민간인들은 뒤로 물러났다. 엔리카 또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물러났다. 예리한 발톱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맹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적은 표창을 꺼내들었고 궁수는 활시위에 화살을 재었으며 전사는 칼을 뽑아들었다.
맹수가 몸을 낮추었다가 펄쩍 뛰어올랐다. 전사에게로 달려든다. 전사는 우로 피한다. 발톱이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적과 궁수가 힘을 담아 일격을 날린다. 허공에 붕 뜬 맹수가 타격을 입었다. 착지는 불안정했고 전사는 그 틈을 노려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는다. 다른 놈이 전사에게 달려든다. “어이! 좌측!” 도적이 외치며 달려 나간다. 전사는 재빠르게 칼을 회수하고 다른 놈을 향해 겨눈다.
그 맹수의 옆구리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은색 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든다. 혈향이 번진다. 피 냄새는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고 맹수들을 더욱 흥분하게 했다. 맹수들이 광포한 울음을 내질렀다.
맹수들은 빨랐고 도약 거리가 길었다. 사람들 사이로 달려드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엔리카는 나무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공격 마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맹수가 사람들 사이로 달려들면 어떻게든 막아 볼 생각이었다.
엔리카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엔리카는 헉 하며 거세게 숨을 들이켰다. 제 옷섶을 움켜쥐었다.
위액이 넘어오듯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엔리카는 부들거리다가 주저앉고야 말았다. 처음 마법을 배웠을 때부터 이랬던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엔리카가 다루던 마력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오던 익숙하고 친숙하던 그녀의 마법이 아니었다.
“언니, 왜 그래? 언니?”
소녀가 그녀를 흔들었다. 어지러웠고 귀가 쨍해서 아팠다. 받아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엔리카는 소녀를 밀어내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주위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엔리카는 고개를 들었다. 소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녀의 옷이 붉게 물들어갔다. 혈향이 짙게 번지고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나온다. 소녀의 눈이 감길 듯 깜빡거렸다. 그럴 리가, 방금 전까지도 재잘거리던 모습이 선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
엔리카는 소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소녀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환자를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엔리카는 제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그녀를 밀쳤다.
“내 딸에게 다가오지 마!”
부모 중 한분은 소녀를 끌어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소녀를 보호하려는 듯이. 무엇으로부터?
엔리카는 그제야 자신의 팔에 보랏빛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기운이 날카롭다는 것도, 손에서 핏물이 뚝뚝 흐른다는 것도 그때 알아차렸다. 모든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으나 단 한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랬구나.
치료, 치료를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소녀는 죽을 것이다. 엔리카는 치료마법을 시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력을 끌어 올리려하자 또 다시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엔리카는 자기자신을 감싸 안으며 웅크렸다. 검보라빛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음성이 귓가에 서서히 번졌다. 소극적이던 음성은 점점 거칠어지고 날카로워졌다. 적의를 띄기 시작했다. “몬스터야......검은 마법사의 수하.....잘도 우리를 속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엔리카는 혼란스러워졌고 눈 앞의 검보라빛 연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순간 통증에 사고가 정지되었다. 엔리카는 떨리는 손으로 어깨 부근을 매만졌다. 날카로운 표창이 어깨와 팔에 박혀있었다. 세 개, 두 개는 어깨 부근에 하나는 팔에.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소매에서 뚝뚝 떨어졌다. 엔리카는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다른 손으로 근처를 더듬기만 하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사와 궁수와 도적은 이제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사는 칼을 앞으로 잡고, 궁수는 화살을 꺼내들고 도적은 표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맹수를 상대하던 무기를 엔리카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냉혹하게 굳은 얼굴들이었다. 엔리카는 도망치든, 항변하든, 방어하든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통증이 머리를 하얗게 침식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문득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애처로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들이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언니......눈이....... 빛나는 연.....보라 빛이야.......”
엔리카는 그제서야 오멘을 떠올렸다.
11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아요. 고통스러우셨겠죠.
아버지, 제가 그런 몬스터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방금 사람을 공격했어요.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제가 그랬어요. 하나는 즉사했고 하나는 큰 상처를 입혔는데 아버지처럼 앓다가 끝내는 죽고 말겠죠.
죄송해요, 아버지. 저를 용서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니면 최소한 저를 경멸하지 않으실 수 있으세요? 저를 두려워하실 건가요?
12
엔리카는 자신이 기억을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각이 뇌를 뒤덮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기억들을 망각에게 넘겨버렸다. 죽어버린 그 도적, 상처 입은 아이, 검은 너울이 덮쳐오던 순간, 홀로 몇 년을 지내오던 나날, 비보를 받았을 때. 모두 잊고 편안해지는 감각이 좋았다.
본디 엔리카는 지난 것에 애착이 강한 이였다. 학자로서는 역사와 기록을 중요시 여겼고 사람으로서는 살아왔던 곳들을 쉬이 잊질 못했고 떠나간 사람들을 자주 그리워했다. 그 때문에 망각이 자신을 지배한 다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였다. 해서, 처음에는 어떠한 기억도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이제는 그녀를 줄 곳 아프게 했다.
엔리카는 시험 삼아 기억들을 몇 개 넘겨보았다. 작은 가시 같은 기억들이었다.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기에 죄책감은 적었다. 다만 기억에 어린 감정이 사라지는 기분이 묘했다. 생각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점차 망각이 두렵다기보다는 위대하게 느껴졌다. 비어있는 것은 셀 수 없다. 0은 숫자인가? 측정할 수 있는 수치는 없지만, 그녀는 점차 대담하게 기억을 넘겼다.
엔리카가 문득 멈춰서 되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인생의 반은 비어있는 상태였었다. 어둠이 스물 스물 뇌를 잠식해갔다. 기억을 잃을수록 엔리카 자신이 엔리카가 아니게 되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녀는 엔리카로써 남아있기 위해 추억들을 꼭 붙잡았다. 가족들, 아버지, 어머니, 오빠, 크리티아스, 숲, 마법, 책, 그녀가 배웠던 생태, 토론, 연구, 버려진 신전, 용병들, 연구원들, 그리고 당신. 잊어선 안 돼. 잊어선 안 돼. 잊어선 안 되는 소중한 기억들이야.
13
레이피스. 당신과 내가 나누었던 약속 기억해요? 모든 일이 끝나면 함께 생태 연구를 하자고 했던 것이요. 사실 생태연구보다는 ‘함께’라는 것이 더 중요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래도 내가 나가서 생태연구를 계속해나가기를 바랬죠. 어쩌면 당신도 중요했던 것은 생태연구보다 내가 무사히 계속 살아나가기를 바랬던 것 같지만요. 죽음 이후에도 걱정할 만큼 내가 그렇게 당신에게 소중했던가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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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왜 살아가야 했더라,
돌이킬 수 없는 의문이 생긴 순간 의식이 훅 꺼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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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하염없이 걸었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이었고 속도는 느렸지만 꾸준히 걸었다. 시선은 텅 빈 채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발은 땅을 디디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남은 습관에 의해 두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직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몬스터의 무리가 보였다. 어둠을 받아들이고 타락했다던 용의 잔재들이었다. 몬스터들은 그것을 발견하게 그르륵 거리며 위협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는 듯 그저 걸었다. 어느 몬스터가 그것을 잡아먹을 듯 고개를 쩍 벌렸다. 그러자 몬스터를 힐끗 바라 본 그것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훅 끼쳤다. 검보라빛 연기가 그것을 감싸면서 피어올라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몬스터는 그것을 바라보았고 그것 또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보랏빛의 맹수의 인광이 번뜩였다. 몬스터는 곧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언제 신경 썼냐는 듯 스쳐지나갔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간에 동류를, 그래서 관계없는 것을 지나갈 때 시선이 그러하였지.
집이 보였다. 익숙한 경관이었다. 엔리카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깜박거렸다.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차근차근 떠올려 보려했으나 실패했다. 이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이곳이었고 도착했으면 된 것이다. 엔리카는 눈앞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혔다. 엔리카는 몇 걸음 더 걸어보려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을 뻗어 반투명한 막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은 저 집으로 가야했고 이것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없에야지. 엔리카의 둔해진 머리로는 그 정도의 결론이 내려졌다. 엔리카는 마력을 끌어 모아 손에 휘감았고 반투명한 막을 내려쳤다. 한번으로는 끄덕 없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내리쳤고 이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내리쳤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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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전 이제 마법사도 아니에요. 어머니가 가르쳐주셨던 모든 마법 술식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머리가 무거워서 연산을 진행시킬 수 없어요. 마력은 이제 제 것이 아니에요. 검고 이질적이에요. 섬세하게 가다듬어 배열할 수가 없어요. 두꺼운 손으로 퍼내듯 무겁고 폭발적으로 그저 터뜨릴 수 밖에 없어요. 이것이 마법이던가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훌륭한 마법사가 되길 바라셨을 텐데.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생태학자의 길을 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마법을 포기하는 길은 아니었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어머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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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이라는 감각이 낯설어 한참 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검붉은 핏방울이 맺혔는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멘도 피를 흘렸던가?
아, 순간 당신이 보였다. 보인 것 같았다. 엔리카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연기처럼 하느적거리는 피부와 형태가 없는 유령사이에 접촉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자신을 붙잡고 우는 것 같았다. 왜 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눈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듯 검어졌다.
그리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영영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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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번졌다.
어느 곳에 어둡고 깊은 숲이 있단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고 독이 든 포자를 내뿜는 버섯이 자란단다. 풀들이 검은 색이고 새하얀 꽃들도 자색으로 물들어 피어나는 이상한 숲이지. 시도 때도 없이 안개가 짙게 끼어서 한번 발을 잘 못 들이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란다. 그러나 그 숲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숲속에 사는 검은 괴물인데.....
잘 읽으셨나요.....(슬쩍
헤헤.....제가 라피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 물론 엔리카도 많이 사랑해요, 레이엔리 모두 무척 많이 많이 사랑해요.
보금님도 무척 사랑해요!!!!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제가 원래 쓰면 길어지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건 제 습관 탓이니 보금님은 부담가지지 마시고 편하신대로 쓰세요!!
히히,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점 있으시면 트위터로 찾아와서 얘기해주세요. 그러니까 제발 블락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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