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외

반전 AU




당신의 찻잔에 독을 넣었습니다.”

 

성기사 테오클레이아는 그가 보필하는 성녀 아리스티드에게 말했다. 아리스티드는 차향을 음미하기 위해 반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테오클레이아를 보았다. 테오클레이아는 눈매나 입가, 찻잔 속 물의 파문에서 감정을 읽어보려고 했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성녀는 본래 항상 그리 웃었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자애를 말하는 당신에게 배신은 낯선 단어였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도 성기사로서의 테오클레이아를 믿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테오클레이아는 말을 반복했다. 성녀가 허락해준 애칭으로 그녀를 부르며.

 

당신의 찻잔에 독을 넣었습니다, 아리스.”

아리스티스의 미소가 멈췄다. 이미 찻잔을 한 모금 들이킨 직후였다. 테오클레이아는 담담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성녀는 곧 피를 쏟으며 쓰러질 것이다. 그 죽음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에 아리스티드가 보일 반응이 궁금했다. 과연 성녀는 분노할까? 처음으로 배신에 치를 떠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늘 그래왔듯 어떤 죄악도 용서를 내린다며 웃을까? 자신을 죽이려드는 성기사에게도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랑을 말할까?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리스티드는 벌떡 일어났다. 테오클레이아의 머리를 잡고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노련한 기사였던 테오클레이아의 몸이 굳어버렸다. 도저히 뗄 수가 없었다. 입맞춤은 진득했고 길었다. 숨이 가빴는데 공기대신 씁쓸한 용액이 울컥울컥 흘러들어왔다. 테오클레이아는 간신히 아리스티드를 밀쳐냈다. 실랑이에 테오클레이아는 티테이블을 헛짚었다. 테이블보가 미끄러졌고 찻잔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클레이아는 쿨럭거리며 입안의 것을 뱉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입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는 이미 독이 든 찻물을 삼켰다. 아리스티드는 단정하게 섰고, 소매로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저런, 테오클레이아.”

 

그를 내려다보는 아리스티드의 목소리에는 측은함이 한껏 깃들어 있었다. 순간 성기사 테오클레이아는 성녀 아리스티드를 노려보았다. 아리스티드는 따스한 시선으로 마주 보며 테오클레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 순순히 독을 받을 거라 생각했나요?”

아리스티드 당신......!”

 

테오클레이아의 머릿속이 하얘졌고 손이 덜덜 떨렸다. 충격 때문인지 독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리스티드는 모든 걸 안다는 듯 웃었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도 사랑하는 법입니다.”

 

테오클레이아는 자신이 성녀를 잘못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련하게도 무엇이든 내줄 것 같이 구는 이가 한 교단의 정점의 직위를 차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리석은 것은 성녀가 아니고 테오클레이아 자신이었다. 아리스티드는 자애롭게 웃었고 테오클레이아에게 속삭였다.

 

뭘 기대하셨나요? 사랑한다는 말?”

 

테오클레이아는 답하지 못했다. 입을 여는 순간 검붉은 핏물이 대신 입가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속이 끔찍하게 타들어 갔다. 시야가 핑 돌았고, 그는 무너져 내렸다. 동요 없는 미소로 성기사를 지켜보는 아리스티드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겼다.






 

 

테오클레이아는 성기사로서 적합한 이가 아니었다. 기사로서의 실력은 뛰어났으나 신앙은 부족했다. 그는 교리를 의심했고, 가르침을 속으로 비방했으며, 도저히 만인을 사랑할 수 없었다. 모든 성직자가 신앙에 충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하며 그럭저럭 묻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성녀를 수호하는 자리에 발탁되었다. 신께서는 어째서 신앙이 이리 희박한 이에게 이런 일을 맡긴 것인가. 자신에게 과업이 주어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러니,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녀 아리스티드. 그녀는 성전에서 현현한 것만 같았다. 사람은 미움을 가질 수도 있는 법인데, 그녀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 마냥, 한없이 큰 사랑만을 내주었다. 그녀를 마주하면 어떤 이라도, 설령 원수라도 사랑해야지,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그래서 테오클레이아는 그녀로 인해 괴로웠다.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으면 한계에 순응하고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모순된 채 돌아가는 세상에,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 이상의 진실한 사랑은 불가능한 영역이고 삶이 그런 거라 여기며,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녀 아리스티드는 그렇게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진실된 사랑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호위하고 있자면 성녀에게 감화되어 신앙을 행하기로 다짐하고, 돌아서서 여전히 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닫기를 수어 번 반복 되었. 어느 순간, 그는 그 간극을 앞으로 평생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단이 건재하게 유지되는 한,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성녀를 지키기로 맹세한 검으로 성녀를 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성기사는 성녀에게 독배를 건네는 상상을 했다. 그 상황을 수백 번 그려보았다. 성기사로서 보장된 명예와 직위, 당장 내일의 안전, 그리고 어쩌면 신께서 베풀어주실 죽음 이후의 구원까지 모두 내버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선 테오클레이아는 견딜 수 없었다.

 

신이, 신께서 만약 보고 계신다면, 이 심정을 신께서는 이해하십니까? 성녀님은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그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테오클레이아는 그 답을 영영 알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의식이 점점 꺼져갔다. 언젠가 속했던 태초의 근원으로.....

 





 

테오클레이아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따라 끔찍한 격통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점멸했고 숨이 막혔다. 정신이 불분명했는데도 테오클레이아는 필사적으로 목 언저리를 움켜쥐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손 위에 얹어진 온기가 느껴졌다. 부드러운 손이 목 위에 포개졌고 낭랑한 주기도문이 들렸다. 숨이 트였다. 테오클레이아는 헐떡이며 그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부모에게 매달리는 어린아이 같이 절박하게. 손의 주인은 테오클레이아를 천천히 다독였다. 손길을 따라 통증이 가라앉았고, 이내 호흡이 편안해졌다. 테오클레이아는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따스한 빛이 느껴졌다. 긴장이 풀어졌고 심장 박동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빛이었다. 테오클레이아는 그 따스함에 잠겨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리고 테오클레이아는 눈을 떴다. 교단의 흰 벽들과 천장은 비스듬한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녁이었다. 테오클레이아는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잘 안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아리스티드가 보였다. 색색의 색유리들을 투과한 황홀한 빛이 그녀에게 떨어져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성녀는 늘 그랬듯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테오클레이아는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보았다.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깨어나셨군요.”

 

아리스티드는 살풋 감았던 눈을 뜨며 돌아보았다. 테오클레이아는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으며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찻잔에 탄 독과, 그녀가 입맞춤으로 건넨 독. 그 충격과 죽음의 통증까지도.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을 사랑해야 진정으로 남을 사랑할 줄도 아는 법이랍니다.”

 

유독 고요한 곳이어서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리스티드는 천천히 다가와 테오클레이아에게 맞게 몸을 낮추었다. 한결같이 평온한 웃음을 입에 걸고 배려가 배어있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아리스티드는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그 손을 천천히 내렸고 뺨을 쓸다가 목울대에 멈췄다.

 

목숨의 소중함을 깨달으셨겠지요. 이번 일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테오클레이아는 목에 얹어진 그 온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과 미소과 따스함에 도리어 격정이 치밀어 올랐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신전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리스티드는 바닥이 긁히는 소리를 들었으나 한층 더 자애롭게 웃었다.

 

사랑하는 테오클레이아, 힘이 들어가지 않을 테니 주먹을 쥐려 하는 건 관두세요. 성기사의 이름 됨에 있어 주먹은 제게 쥐는 것이 아니지 않던가요.”

 

테오클레이아는 기가 막혔다. 아리스티드는 아직도 자신을 성기사로 여기는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 이가 여전히 책무를 다하리라 생각하는가? 오만인가 어리석음인가? 사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수없이 들었던 사랑, 자비. 

 

독은 정화했어요. 이 또한 신의 자애로 이루어지는 일이겠지요. 우리는 신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성녀는 또다시 자애를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 또렷한 유화나 조각상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이었다. 그를 잡아끌었고 입술을 맞추었듯 필요하다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사람.

 

그 순간 테오클레이아는 정말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기에, 저런 가장 완벽한 이를 빚어 정점의 자리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길이 들지 않은 칼은 상처받지 않는 이에게 속박시켰을 것이고. 신앙이 부족한 성기사를 써먹는, 빌어먹게도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테오클레이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입속에서는 피맛이 났다. 그걸 지켜보던 아리스티드는 손을 그의 머리로 가져가며 축복의 언어를 외웠다. 빛이 다시 한번 테오클레이아에게 흘러내렸다. 찬란함 속에서 테오클레이아는 죽음 앞에 본능적으로 성녀에게 매달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두려웠고 절박했는지 까지도. 테오클레이아는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잔뜩 움켜쥐었던 적의가 모래알처럼 흘러나가는 것을 느껴졌다. 그는 일어나려다가 쓰러지듯 성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결국 이리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 아리스티드는 다정하게 웃었다. 성녀는 내려다보되 오만으로 비치지 않는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이었다. 느슨하게 풀린 테오클레이아의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경전을 외기 시작했다


신께서 만물을 굽어보고 축복을 내리시니 그 마음은 사랑이었다. ......”

 

앞으로 당신을 적대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지도 못 할 것이다.


황혼이 푸르게 기울며 서서히 가라앉는 신전에서 아리스티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테오클레이아는 무력하게 경전을 듣기만 했다.

 

“....그러니 신의 뜻을 이어받게 하소서. 사랑을 나누고 베풀어 더 많은 이에게 가닿도록 하소서. 그들이 신의 뜻을 깨우치고 또다시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그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엔리 500일이다!!!!  (0) 2018.12.27
[합작] 라리안 After  (0) 2018.12.19
레들리의 일기  (0) 2018.12.09
엔리카 생존 if(2)  (0) 2018.02.06
엔리카 생존 if (1)  (0) 2018.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