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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 창작

[단체연성]-1주차 주제: 새해

11. 공휴일이므로 모든 공공기관이 그렇듯 비어있었다. 중요한 것은 연휴 다음날이었다. 그것이 12일이든, 하루 이틀 정도 추가되어 13, 4일이 되든, 꿈같게도 넉넉한 휴가가 떨어져 17일 정도 즈음이 되든지 간에. 모든 곳이 그렇듯 신년을 맞아 신년 목표를 세우고 단체의 마음가짐을 새로 가지고자 할 것이었다. 동참하고 싶어 하지 않는 구성원도 많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학교는 조금 달랐다. 학교의 한 해는 삼월을 기준으로 시작된다. 그러니 다른 기관과는 다르게 새해가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연휴 다음날, 당직인 교사 몇몇이 들어오면서 새해인사를 간단히 나누겠지만 딱 거기서 그칠 것이다. 학생들이 있었다면 좀 더 새해가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웅성대며 잔뜩 들떠 새해 분위기를 냈을테니까.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를 싹 비웠다. 방학이니까. 신년이기에 할당되는 업무는 진작부터 떨어졌을테고 교사들은 번갈아가면서 학교에 나타나며 새해인사를 오래오래 써먹을 것이다.

 

영빈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에 발을 들였다. 모든 문이 잠겨 있겠지만 교사들을 위해 항상 열어두는 뒷문을 알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밀고 들어가서 교장실로 곧장 향했고 문 앞에 멈췄다. 문은 퍽 고급스러웠다. 영빈은 바뀐 문패를 흘낏 보고 노크를 했다. 텅 빈 학교에 노크 소리는 크게 울렸다.

 

들어와.”

 

목소리는 낭랑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영빈이 별다른 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누군지 안다는 듯이. 영빈 또한 응답하는 대신 그냥 문을 열었다.

 

교장실은 더웠다. 영빈의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보일러가 한참이나 높은 온도로 틀어져 있었을 것이다. 코트는 옷걸이에 걸어두고 가벼운 차림을 한 경림이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영빈은 목도리를 풀어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그러게. 오랜만이네.”

 

경림은 야살스럽게 웃으며 받았다. 영빈은 접대용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바빠 보이던데, 어떻게 시간을 냈어?”

새해 인사 드리러왔지요. 그럴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습니다. 그러는 누님이야말로 새해에 학교에 계십니까?”

나야, 학교가 워낙 나를 필요로 해서 말이지.”

 

영빈은 얼굴을 찌푸렸다. 경림은 더욱 진하게 웃으며 커다란 나무 탁자에 팔을 얹었다. 탁자에는 까맣고 무거운 명패가 방문객을 향해 놓여 있었다. [교장 고경림]이란 글씨가 정자로 새겨져 있었다. 영빈은 그 명패를 슬쩍 보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경림은 영빈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듯 턱을 괸 채 고개짓을 했다.

 

이번년도를 맞아 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죠. 사립학교라고 하더라도 교장이 임기가 끝나도 다시 재임할 수 없게 되었지요.”

 

경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눈을 두려워하던 것은 어릴 적에나 하던 일이다.

 

누님, 누님께서는 이만 물러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오래 해먹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만 쉬시지요.”

 

영빈은 단호하게 경림을 보았다. 경림은 비소를 잔뜩 머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이 자리를 원한다고.”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럼 왜 나를 쫓아내지 못 해 안달일까?”

누님이 물러가신다고 그 자리가 제게 떨어지기나 하겠습니까? 그저 누님이 이러고 계신 것을 두고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 숙부님이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계시는 마당에 뭘 그리 깔끔한 척 할까?”

 

경림이 깔깔깔 웃어댔다. 영빈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누님. 저는 진심입니다.”

사랑하는 아우야. 여긴 아무도 없어. 좀 더 솔직해져봐. 교감의 위치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는 거지?”

 

경림은 일어나 영빈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영빈은 그 손을 슥 밀어내었다. 경림은 영빈을 내려다보았고 영빈은 경림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서로의 눈이 맞부딪쳤다.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는 일 없이 대치가 유지되었다.

 

이 학교에 체육 강사가 학교 돈에 손을 대서 잘리는 일이 있었죠.”

그래. 관리가 소홀했지. 설마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 방침을 달아두었어.”

모든 자금 이동에 누님의 검수를 거치도록 바꾼 것 말입니까?”

확인 절차가 미흡했던 건 사실이지 않았니?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야.”

미흡했다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교내의 예산에 외부 강사가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글쎄다. 방법은 아직 알아내지 못 했어. 강사주제에 어지간히도 완강하더라.”

그 사람, 체육 강사는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정말 모르는 기색이더군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제대로 알지 못 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고영빈.”

 

경림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냉랭한 말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돈을 위해서 사람 하나를 생매장 시키는 사람으로 비춰지겠어?”

 

영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버티려고 했으나 결국 시선을 돌려버렸다. 대신 바닥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을 제가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년부터는 누님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말씀드렸죠? 법이 그리 바뀌었으니까요.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올해군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경림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교장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 동안 영빈은 몰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 생각해?”

뭘 모르는 채 하십니까? 이런 소식은 빠르게 꿰시면서.”

글쎄...... 그리 생각하나보네.”

학교가 아직까지 어영부영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모든 안건을 미리미리 잡아두는 곳인데. 이런 안건은 몇 개월 전에 정해졌겠죠.”

너야 말로 학교를 잘 모르는 모양이야.”

 

경림은 손가락을 두 개 펴서 세웠다.

 

학교는 삼월부터 시작해. 끝나는 건 이월이고. 오늘이 새해라지만 아직 두 달이나 남았잖아.”

 

영빈이 아는 경림은 그리 어리석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더 생각해봐도 누님이 오만에 취해 판단력의 흐려졌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영빈은 기가 차서 내뱉었다.

 

겨우 두 달 가지고 될 리가 있겠습니까. 고집 그만 부리시죠.”

 

똑같은 얘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영빈은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서 목도리를 다시 챙겨들었다.

 

벌써 가려고?”

하려던 얘기는 다 했습니다.”

새해 인사로 왔다면서 그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잖아?”

“......”

, 이해해. 워낙 바쁘니까. 자기 학교 일 하면서 남의 학교 사정도 꿰고 있으려니, 얼마나 바쁘겠어? 정신이 없을 수도 있지.”

 

영빈은 문간에서 잠시 경림을 보았다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의자 위에서 경림은 손을 가다듬어 모았다.

 

새해 복 많이 받거라, 아우야. 신년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길 바래.”

 

영빈은 가차없이 문을 받아버렸다.

 

*

 

219. 학교의 종업식 및 졸업식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영빈은 연락을 받았다. 행사가 진행 중이었기에 전화를 끊고 용건은 문자로 보내달라고 전송했다. 이윽고 문자가 왔다. 그 학교에서 전 교장 고경림이 교장자리에서 물러나고 대신 이사장 자리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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