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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 창작

[스터디] 서양의 무당

그 아이는 독특한 아이였다. 마을의 모든 아이들은 그런 아이는 처음 본다고 수근 거렸다. 눈과 코, , 귀의 위치가 우리와는 사소하게 달랐고 피부가 어두웠다. 머리는 항상 위로 묶어서 모자 안으로 집어넣었으나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검은 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동자도 빛이 스며들지 않는 새카만 색이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그런 색을 흔치 않았다. 그 애는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채 거의 항상 입을 꾹 다물었으나 그 애의 말이 어눌하다는 것은 이미 온 마을에 소문이 퍼진지 오래였다. 그 애의 이름은 였다. 이름마저도 기묘했다.

 

휘는 몇몇 어른들과 상단을 따라 이 마을에 왔고 빈집에 살게 되었다. 갑자기 온 아이는 마을 애들과 섞이려 들지 않았다. 고고하게 얼굴을 들었고 마을아이들을 깔보는 기색으로 내려 보았다. 본래라면 순식간에 따돌림을 당했을 텐데 아이들은 그러질 못 했다. 그 애의 시선에는 절로 섬뜩함을 느끼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냉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는데 마을 아이들은 선득한 느낌을 받으며 슬금슬금 물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대신 마녀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뒤에서 애들끼리 속닥였다. 까마귀와 대화하고 밤이면 묘지에서 주문을 외운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은밀하고 깊게, 소문을 처음에 퍼뜨렸던 사람도 결국은 소문을 믿어버릴 정도로 아이들 사이에 한참을 돌았다.

 

그 애는 마녀야, 내가 봤다니까? 그 애는 이상한 물건들을 잔뜩 가지고 있어. 분명 사악한 마법을 걸 때 쓰는 것 들일거야.”

혼자 빙글빙글 돌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린다니까. 악마를 불러내려는 걸 거야.”

 

교회에서 예배를 끝내고 마을 아이들은 교회 뒤편에 모여서 수근 거렸다. 마침 그날은 목사님께서 악마의 사악함에 대해서 말하신 날이었다. 악마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악마로 인해 몰락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엄숙하게 우리에게 일러주셨고 악마와 어울리는 이들은 신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거라며 끝맺으셨다.

 

그 애가 왔을 때 쯤 검은 고양이가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어? 악마는 검은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하잖아.”

어머, 정말 마녀가 불러 온 악마인 가봐.”

 

그 무리 속에는 우리 남매도 뒤섞여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있다가 그 말에 슬쩍 누나를 보았고 마침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누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누나가 턱짓으로 집 방향을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부모님이 오늘 일찍 오라고 하셨어. 이만 가볼게.”

잘 가, 안네. 잘 가, 요슈아. 내일 만나자.”

 

마을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도 웃으면서 손을 마주 흔들었지만 그 다음에는 빠르게 걸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만약 그 애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우리도 마녀일 것이다.

검은 고양이를 보살피는 건 우리 남매였으니까.

 

 

*

 

 

마을 사람들은 검은 고양이는 악마나 마녀들이 변신한 존재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 이셔서, 우리 집에서 기르던 어미 고양이가 낳은 새끼에게서 검은 털이 돋아났을 때 냇가에 던져버리고 오라고 우리 남매에게 건네주실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었던 그 고양이는 너무 작고 어렸다. 너무 작아서 울지도 못한 채 발을 꼼지락거렸고,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었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것을 보며 우리는 마음이 약해졌다. 우리는 부모님 몰래 고양이를 키우기로 했다. 잠잘 곳을 만들어주었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으며 메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메리, 우리 고양이 메리.

 

누나와 나는 집으로 향하는 대신 메리를 찾아 흩어졌다. 평소에는 그래도 골목길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메리를 발견하면 정말 붙잡아서 죽일지도 몰랐다. 나는 골목을 비집고 다니며 메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내가 메리를 찾는다는 것을, 검은 고양이를 기른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자꾸만 목소리가 작아졌다.

 

메리야.....”

그렇게 불러서 고양이를 잘도 찾겠네.”

 

누군가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휘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메리가 한가롭게 생선 머리를 먹고 있었다. 휘는 가볍게 메리의 털을 쓸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휘가 메리를 꽉 붙잡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메리를 돌려줘!”

내가 고양이를 훔쳐간 것처럼 말하네. 네 고양이가 배고파보여서 먹을 것을 잠시 나눠줬을 뿐이야. 요즘 애나네 집에서 쥐약을 내놓는 모양이라서 배고픈 상태로 돌아다니면 위험하거든?”

거짓말 치지 마, 이 마녀. 메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휘는 눈을 치켜떴다. 내가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마녀(witch)가 아니야!”

 

그 애는 소리를 내질렀고 나는 놀라 몸을 움츠러트렸다. 그 애는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왜 아이들이 그 애 앞에서 마녀라고 놀리지 못 하는 지 알만큼 차갑고 무서운 시선이었다.

 

제발 그딴 짓 좀 그만해. 내가 마녀라고? 난 그 따위 것이 아니야. 나는 무당(巫堂) 이라고!”

 

그 애에게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m...으로 시작하는 발음이었는데? 처음 듣는 단어였고 그 애의 이름만큼이나 낯설고 이상했다. 난 그 애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 애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나를 힐끗 보다가 고개를 돌렸지만 하긴, 쟤가 뭘 알겠어?” 하고 중얼거리더니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낭랑한 어투였다.

 

무녀는 신을 모시고 신의 영력을 행사하면서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존재야. 령과 통하며 그들을 불러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편히 쉬도록 인도하는 일을 하지. 그리고 악귀를 몰아내거나 그들을 달래주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기도 해.”

 

휘는 어떠냐는 듯 나를 보았다. 나는 충격에 휩싸여 얼어붙어 있었다. 그 애의 발음은 서툴렀고 하는 말들이 어려워서 반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휘가 두려워져서 벌벌 떨었다. 유령과 이야기한다고? 휘는 정말 무시무시한 마녀였다. 더군다나 신도 우습게 여기는! 맙소사, 어떻게 신에 대해 저렇게 함부로 말할 수가 있지? 저건 어지간한 신성모독이 아니다. 세상 무서운 것이 없다는 듯 선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는 건달 잭도 저렇게는 말하지 못한다.

 

,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신의 벌이 두렵지도 않아? 지옥에 가게 될 거야.”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애는 코웃음을 쳤다.

 

너희는 그 너희의 신이 세상의 전부이지?”

 

너희 신이라고, 선을 딱 긋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신은 절대적이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 존재이시다. 세상에,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 줄이야. 저 애는 마녀 정도가 아니라 이도교였다. 저 애와 어울리면 벌을 받을 것이다!

 

멍청하고 한심해.”

 

애는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나는 한참동안을 꼼짝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떨기만 했다. 메리가 폴짝 뛰어와서 왜 그러냐는 듯 다리에 뺨을 비벼 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메리를 안아 올렸다.

 

그날 밤에는 신에게 휘가 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악몽을 꾸다가 간밤에 깨서 한참을 떨었다. 나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무섭고 꺼려져서 나도 잘 떠올리지 않으려 들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메리가 아직까지도 살아있었을 수도 있는데.

 

 

*

 

 

메리.....”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메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메리의 검은 털은 변함없이 윤기 나고 부드러웠으나 그 아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왔다. 섬뜩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때고 말았다. 메리는 흰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메리는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함께 놀던 뒷골목에서 햇살 아래 뒹굴다가 깜박 잠에 빠졌을 때처럼. 하지만 내가 용기 내어 메리를 흔들었지만 그때처럼 깜짝 놀라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메리..... 왜 이러고 있어? 여기는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야, 어서 일어나서 가자? ?”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나와 장난을 쳤고 야옹거리며 나를 불렀고 종종걸음으로 함께 산책을 했는데.

 

메리가 죽었을 리, 없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메리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가물가물해졌다. 목이 턱턱 매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메리 앞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 주위에 멈춰서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들은 요슈아가 저기서 왜 저러고 있냐고 수근 거렸다. 누군가는 메리의 시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고 아침부터 검은 고양이를 봐서 재수 없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메인 목으로 그저 메리, 메리하고 간신히 이름을 부르고만 있었다. 메리를 깨우는 게 너무 중요해서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어떤 어른이 다가와 더럽다고 메리를 치우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메리 위에 와락 엎어졌다. 메리를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흙바닥에 웅크려서 옷을 더럽히면서도 차가운 메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람들은 당황해서 나를 일으키고 메리를 가져가려고 했다.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메리를 더 거세게 끌어안았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힘센 벤 아저씨도 나에게서 메리를 빼내지 못 했다.

 

죄송합니다, 비켜 주세요. 잠시만요, 그 애는 제 동생이에요, 요슈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나는 울먹이면서 누나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메리를 발견하였고 표정이 굳었다. 눈만을 깜빡일 뿐 잠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고 굳게 일어나서 내 팔을 붙잡았고 나도 일으켜 사람을 헤치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그때까지도 메리를 품에 꼭 안은 채였다.

 

 

메리를 발견한 곳은 애나 아주머니의 가게 앞이었다. 휘는 분명 애나 아주머니가 쥐약을 놓는다고 내게 말했었다. 메리는 쥐약을 먹고 결국 죽어버렸다. 내가 휘의 그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메리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

 

 

요슈아, 너는 아직 어리고 마음이 여리기 때문에 그저 고양이 시체일 뿐인데도 놀라서 울었을 거라고 내가 사람들에게 말했어. 그것이 검은 고양이든 뭐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메리를 모르니까....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너를 혼내지 않을 거야. 마을 아이들이 널 따돌리지 않을 거야, 괜찮을 거야.”

 

햇살이 고요하게 골목길 사이에 내려앉고 있었다. 메리가 생전 좋아하던 따스한 햇살이었다. 누나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뭐하고 생각하는 지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메리가 죽었는데, 이젠 메리를 다시 볼 수 없는데.

 

요슈아.”

 

누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멍하니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나의 울 것만 같은 표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 이젠 메리를 보내줘야 해.”

 

그 말에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이 부을 정도로 울고 울다가 간신히 그쳤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도 눈물이 나왔다. 나는 누나에게 안겼고 누나는 나를 감싸 토닥였다. 이번에는 누나도 울며 흐느꼈다.

 

 

*

 

 

고양이를 위한 관은 없었다. 우리는 동네 상점 뒤편에 버려진 과일을 담았던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는 너무 딱딱해보여서 아끼던 담요를 바닥에 깔아주었고 꽃을 따다가 아름답게 장식해주었다. 차갑게 늘어진 고양이의 몸에 손이 닿을 때 마다 울음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조심히 뚜껑을 닫아서 흰 천으로 감싸 숨겼고 누나는 밭 구석에 있던 삽을 빼돌렸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누나, 메리는 어디로 가?”

뒷산으로 가자.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줘야지.”

그거 말고 메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데?”

메리는 착한 고양이었잖아. 천국으로 갈 거야.”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눈을 깜박이며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리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검은 고양이도?”

 

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나의 침묵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검은고양이가 악마라고 했다. 우리는 메리를 사랑했고 믿었지만 그들의 말이 귀가에 항상 들러붙었다. 검은 고양이, 재수 없어, 지저분한 악마 새끼들, 가까이 하지 마렴. 죽으면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테다. 메리를 믿는다고 해서 그 모든 말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검은 고양이는 죽으면 지옥으로 간대잖아.....”

그런 말 하지 마, 요슈아.”

만약에 메리가 지옥가면 어떡해? 엄청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이랬잖아. 메리를 그런 곳에 보낼 수는 없단 말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니? .....집에 가서 기도드리자. 메리를 천국으로 이끌어달라고 빌자. 그러면 들어 주실 거야.”

아니야 누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누나 휘 알지? 그 애가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댔어.”

세상에, 요슈아!”

 

누나는 나를 크게 혼냈다. 그런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신께 천벌을 받을 거라고. 하지만 그날만큼은 나도 때를 썼다. 한번 그 애에게 물어는 보자고, 정말 만에 하나 천사들이 메리의 모습만 보고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지 않냐고. 메리가 그런 끔찍한 곳에 가게 되는 건 상상만 해도 싫다고. 지금 그냥 메리를 보내면 나는 불안해서 평생 후회하며 울 것 같다고.

 

그리고 가끔, 중요한 순간에 누나는 나를 이기지 못 했다.

 

*

 

 

해서 나를 찾아왔다고?”

 

그 애의 시선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나를 내려다보았는데 얼마 전에 만났던 일도 떠올랐고 괜스레 무서워져서 나는 자꾸 벌벌 떨었다. 나대신 언니가 설명을 했다. 처음에는 휘는 우리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았지만 설명을 듣더니 조금씩 누그러졌다. 휘는 고양이를 보여 달라고 했고 나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휘는 메리를 말없이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생전에는 핍박받다가 제 명을 온전히 채우지도 못 하고 죽어버린 가엾은 혼이구나. 분명 맺힌 한이 클 것이야. 이대로라면 구천을 떠돌겠지. 내가 혼은 달래어 가야할 곳으로 보내 주마, 그곳에서 편히 쉬도록.....”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휘에게 물었다.

 

천국(heaven)으로 보내준다는 거야?”

아니,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인데..... 네 마음대로 생각해.”

어쨌든 지옥은 아니라는 거지?”

.”

정말이지?”

당연하지. 우리는 저주는 하지 않아.”

 

나는 확답을 받아내고서야 물러났다. 휘는 조심히 상자 뚜껑을 닫아주고 일어났다.

 

내일 정오에 우리 집의 창고로 와. 숲 입구에서 왼쪽 길로 들어오면 보일거야. 오면 제사를 지내지.”

 

 

*

 

 

휘의 집은 마을과 떨어져서 산 속에 있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길을 빙 돌아갔다. 신비스럽거나 음침한 마녀의 집을 떠올렸던 생각보다 평범한 집의 모습에 안심했다. 그래도 긴장되는 건 긴장되는 것이어서 집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우리는 집을 돌아 뒷마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고 우리 눈에 비친 것은 꽤 이상한 풍경이었다.

 

창고는 좌우로 물건을 쌓고 중앙을 네모나게 비워두었다. 허름한 창고에는 틈새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들이 고요하게 허공을 떠도는 것이 보였다. 정면에는 단이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과일들이 차려져있었다. 과일들 옆에는 촛불들이 여러 자루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벽에는 잔뜩 붙은 초상화들이었다. 똑같이 검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표정이 험악했고 누군가는 유순해보였다. 무섭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대체 누구의 그림일까?

 

휘는 그 광경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항상 보던 약간 음침한 인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깨끗이 씻었는지 머리카락에 윤기가 났고 눈가에 물감을 칠해 화장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애는 생전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꽃이나 새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빛깔의 화려한 옷이었다. 말로만 듣던 귀부인의 치마처럼 반짝였고 소매와 자락이 로브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또 머리에는 챙이 있는 딱딱한 붉은 모자를 썼는데 구슬이 꿰어진 줄이 챙의 양 옆을 잇고 목 아래로 늘어졌다.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기묘했다. 조금 낯설어도 우리 또래로는 보였던 전과는 달리 도무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들어와, 거기 앉아. 고양이는 이쪽에 놓고.”

 

휘는 우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휘의 말을 따라 메리가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구석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제야 휘는 일어나 우리는 돌아보며 서늘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 눈에는 이상하게만 보일 법한 행동들을 내가 할 거야. 이건 이쪽의 관습이니 너희는 이해를 해주어야해. 아니, 이해는 필요 없고 그저 내가 뭘 하든 개입 하지 마. 입도 빵긋하지 말고 나를 붙잡지도 말고, 알겠어? 방해 하지 마.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벌써부터 아무 말도 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우리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휘는 만족스럽게 웃었고 단으로 걸어갔다. 벌써부터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휘는 불을 머금고 연기를 내는 나무막대기를 긴 화병 같은 곳에 꽂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앞의 그림들을 향해서. 저것이 우상이었구나. 우리의 신이 아닌 우상을 저렇게 섬기는 것을 보니 조금 불편해졌고 나는 다시 휘가 무서워졌다. 분명히 저건 이도교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휘가 아까 전에 해 두었던 말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메리를 부탁했기 때문에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휘는 중앙에 섰다. 흰 부채를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려 가장 높은 곳이 이르려는 순간....

 

거기 웬 놈이야!”

 

난데없는 외침에 휘는 부채를 떨어뜨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고 허우적거리다가 쌓여있는 그릇을 무너뜨렸다. 철 그릇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누나는 까치발을 들고 창밖을 보았다가 누군가를 보고 잽싸게 바닥에 웅크렸다. 휘는 그런 나와 누나를 다짜고짜 잡아당겨 창고 안의 다른 문 안에 집어넣었다.

 

여기 꼼짝 말고 조용히 있어.”

 

문짝이 닫혔고 우리는 숨을 들이키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 밖에서는 그릇을 정리하는 듯 잘그락거렸고 이내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사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 , 휘 너였구나.”

 

어제 떠날 때 석 달은 걸린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왜 벌써 오셨나요?”

 

우리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 사내가 창고 안으로 들어와 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휘가 상단과 함께 이 마을로 올 때 함께 왔던 사람 중 하나였다. 휘가 이 마을에 정착하는 것을 돕고는 훌쩍 떠났다. 상단에 속한 사람이어서 상단이 마을에 들릴 때만 찾아오는 줄 알았는데 그 외에도 만나러 오는 줄은 몰랐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휘와 닮았다. 가족이나 친척일까?

 

휘가 겁을 주며 우리를 빼돌린 것에 비해 분위기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낮고 부드러운 어조로 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 둘은 맥이 풀려서 한숨을 쉬었다.

 

두고 간 물건이 있었다. 가지러 왔단다. 그런데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니?”

저는......”

 

말이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게 바뀌었다. 나는 누나를 돌아보았으나 누나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누나는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지만 우리 지방의 말밖에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마 휘가 살던 곳의 말일 것이다.

 

 

*

 

 

알 수 없는 대화가 길어지자 긴장이 풀어지고 슬슬 지루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아까전의 건물이 창고로 위장한 곳이었지만 이곳은 정말 창고였다. 한쪽 구석에는 곡식이 쌓여있었고 다른 쪽에는 농사기구가 쌓여있었다. 우리 집 뒤편에 쌓여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발짝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상한 기구들이 눈에 띄었다. 붉은 잉크로 커다랗게 뭐라고 쓰여 있는 노란색 종이 뭉치,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든 우람한 사람 형상, 아주 얇은 종이를 접어서 만든 꽃 장식, 어떻게 연주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악기들, 화려하게 생긴 칼......

 

누나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더니 아예 물건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리 긴장이 풀어졌다고 해도 낯선 장소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불안해서 나는 재빠르게 누나를 쫓아갔다. 누나는 물건들 사이에서 몸을 빼내었다가 나를 발견하곤 손짓하더니 다시 물건들 사이로 들어갔다. 나도 누나를 따라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는 물건들 사이로 들어갔다.

 

요슈아, 이것 좀 봐.”

 

누나가 벽과 물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어떤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아마, 두꺼운 종이로 만들었을 그것은 굉장히 높았고, 판 여러 개가 연결되어 굉장히 길었다. 그림은 한눈에 보려면 몇 발자국 물러나야 했다. 우리는 한 번도 이런 거대하고 화려한 그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와는 옷도 다르고 머리 모양도 달랐지만 분명 사람들이었다. 먹을 것을 팔았고, 북적북적했고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 나는 이 광경을 안다, 이건 축제였다. 긴 그림을 따라 축제가 이어졌고 나는 축제를 따라 걸었다. 휘가 사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서도 축제를 벌이고 놀고 웃는구나.

 

그리고 그림 중앙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는 휘가 있었다. 붉고 푸른 의상, 검은 모자, 한 손에 든 부채. 분명 휘였다. 휘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휘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들어 구경하거나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 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누군가는 마치 예배들 드리듯 경건해보였다. 누군가는 휘 앞에 무릎을 꿇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바라면서? 나는 휘를 생각했다. 이곳이 아닌 휘가 원래 살던 곳에서 휘는 저렇게 춤을 추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휘에게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그렇게 휘는 살아왔을 것이다. 상상이 잘 가질 않는 세계였다.

 

 

*

 

 

그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지 못 해?”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밖에 낯선 사람이 있고 우리가 숨어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가 물건을 뒤지던 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문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까의 사내는 고함을 치고 있었고 휘는 그에 팽팽히 맞서며 빠르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휘가 그리 빠르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아직도 무당 노릇을 한다고? 아직도 네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사내는 우리지방의 말을 사용했고 휘는 우리가 알지 못 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내 쪽밖에 알아듣지 못 했다.

 

똑똑히 봐! 너희가 무당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마을 사람들이 무당을 믿었기 때문이야. 이곳의 누가 무당을 찾겠어? 여기는 단 하나 뿐인 신이 지배 하는 곳이야! 이곳에 무당은 없어! 없다고! 네 수많은 신과 전통도 여기에서는 허상일 뿐이야!”

 

그 말을 들은 휘는 그대로 굳었다.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나는 문 틈새로 휘의 얼굴을 보았다. 그건 죽은 메리를 처음 보았을 때의 누나의 표정과 똑 닮아 있었다.

 

 

*

 

 

.....”

 

사내가 뭐라 더 떠들고 떠났다. 우린 그제 서야 문을 열고 나와 조심스럽게 휘에게 다가갔다. 휘는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난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무슨 상황이 일어난 건지도, 어떻게 달래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누나는 휘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무슨 소리야?”

우리 고양이의 장례를 치러주기로 했잖아. 모른 척 할 거야?”

, 지금도 내가 그걸 해 줄 수 있는 상황 같아 보여?”

“......하긴 기대도 안 했어. 아무리 고양이라 해도 그렇게 중요한 장례식을 마음대로 맡았다, 취소했다 한다니. 무당이라는 게 그런 거구나?”

 

휘는 우리를 쏘아보았다. 시근덕거리며 손을 떨었는데 한 손에 들린 방울이 파르르 떨리며 짤랑거렸다. 나는 황급히 누나를 붙잡았다.

 

누나, 대체 왜 그래?”

 

휘는 사내에게 혼이 났고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고개 숙여 빌었다.

 

, 미안해. 누나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제발 도와줘. 우리는 네 도움이 필요해.”

 

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휘가 무척 화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슬며시 들어 보았던 휘는 뜻 밖에도 웃고 있었다. 휘는 누나처럼 팔짱을 끼었다.

 

나를 그렇게 보았으면 애초에 장례를 왜 부탁했어? 그리고 무당이 이런 거라니, 그건 참을 수 없는 말인데.”

 

그래도 날이 선 어조였다. 그러나 휘는 곧 숨을 가다듬었다. 우리를 바로 보며 분명하고 흔들림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오늘 자정, 전나무 숲의 공터로 와. 그곳에서 너희 고양이의 명복을 빌어줄게.”

 

 

*

 

 

밤이 깊어지고 부모님이 잠에 들자 우리는 창문을 넘어 집을 빠져나왔다. 신발을 신고, 겉옷을 걸치고 메리가 담긴 상자를 조심스레 들고 숲으로 향했다. 달 없는 밤이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해서 얼추 전나무 숲까지는 갔으나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숲 사이에서 불빛이 보였다. 그곳에 휘가 종이로 된 등을 들고 서있었다.

 

이리로.”

 

휘가 전나무 사이에서 손짓했다. 그리고는 어둑어둑한 숲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이 있었지만 발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아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았다. 바람소리, 새 울음소리, 풀이 스치는 소리가 밤의 숲에서는 으스스하게 울렸다. 기묘한 의상을 입은 채 걸어가는 휘를 따라 어두컴컴한 숲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이상한 그림자들이 무서워서 나는 누나의 손을 꼭 잡았다.

 

곧 공터에 다다랐다. 이곳은 마을과 떨어져 있어 들키지 않고 휘가 의식을 치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휘는 너무 어두워서 불이 필요하다면서 모닥불을 지폈다. 그동안 누나는 땅을 팠다. 장례가 끝나면 메리를 묻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둘의 모습이 낯설어서 구석에서 한참이나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이도교의 풍습이다. 어른들에게 들키면 분명히 크게 혼날 것이다. 몇 대 맞는 정도가 아니라 마을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뒤돌아 마을로 뛰어가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모든 걸 잊고선 자고,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신께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용서해주세요, 어버이시여. 어린 양이 악마의 속삼임에 홀려 잠시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들고 있는 고양이 시체가 발목을 잡았다. 생전에 메리는 가벼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몹시 무거웠다. 내가 이걸 들고선 한 발짝도 뒤로 가지 못 할 것만 같이. 그리고 진지하게 불을 지피고 있는 휘의 표정도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돈 한 푼 준다고 약속한 적 없는데 휘는 온 정성을 다해서 메리의 장례를 도와주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는 걸까?

 

여기는 마땅한 장소도, 물건도 없고 상황도 여의치 않아서 간단하게 열 수 밖에 없어. 처음부터 악사도 없었으니 별 수 없었지만.”

 

휘는 모닥불을 쑤시던 나뭇가지를 불에 던지고 일어났다. 부채와 방울을 꺼내어 쥐는 모습에 우리 남매는 방해되지 않게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의식이 시작되려고 했다.

 

하지만 내 최선을 다해 너희 고양이의 명복을 빌어주마.”

 

휘는 공터 한가운데 섰다. 흰 부채를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려 가장 높은 곳이 이르렀을 때, 활짝 폈다.

 

그리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광경을 지켜보았다.

 

휘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가 살던 나라의 언어일 것이다. 멜로디는 없었지만 음이 높아졌다 낮아졌다하며 리듬을 만들어내었다.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끊어지는 일 없이 계속 이어졌다. 사람을 홀릴 듯이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소리였다. 휘는 뜀을 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애는 한손에는 부채를, 한 손에는 방울을 쥐고 팔을 크고 부드럽게 휘저었다. 방울에서 짤랑짤랑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전나무 숲에 퍼지자 그에 반응하듯 바람이 불었다. 스산한 바람에 나무들이 가지를 부딪쳤다. 은은하게 세찬 물소리 같은 것이 사방에 번졌다.

 

바람에 불이 날뛰기 시작했다. 솟아올랐다가 낮게 깔렸다가, 꺼질 듯 작아졌다가도 불길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 일정한 모습이 되었다. 호리호리하고 둥그스름한 불길이 솟고 꼭대기에 뾰족한 불길이 양옆으로 일렁였다. 그 위에 뒤로는 길고 가는 불꽃이 솟아 살랑거렸다. 불길은 계속 타오르며 변했지만 형체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불에 시선을 사로 잡혔다. 검은색도 아닌 주황빛에다가 계속 흔들렸지만 우리는 알아 볼 수 있었다. 누나가 탄성을 질렀다.

 

메리!”

 

불로 이루어진 메리는 야옹하고 울 때처럼 입을 벌렸다. 나는 불길로 다가가려했다. 뜨거운 것도 모르고 품에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누나가 나를 붙잡고 말렸다. 우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메리는 네 다리로 섰다. 그리고 펄쩍 뛰어 올랐다. 불똥이 튀었고 연기가 울컥 튀어나와 내게 달려들어 품에 부딪혔다. 나는 연기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허무하게 손 사이로 흩어졌고 연기 자락은 밤하늘로 올라가 사라졌다.

 

 

모닥불은 잦아들었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휘가 춤을 추며 옷자락을 흩날리는 대로 연기가 휘어지며 겹겹이 쌓이고 점점 퍼졌다. 사방이 희게 물들었다. 숲의 모습이 점차 아른 거리다가 뿌연 연기 사이로 사라졌다.

 

불빛에 물들어 붉은 연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사람들, 아주 많은 사람의 형상들. 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외고 방울을 짤랑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 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울고, 웃고, 경배하고, 소원을 비는 휘가 살던 곳의 사람들. 내가 그림에서 보았던 풍경.

 

휘는 마지막으로 어떤 소리를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허공으로 떠오르며 춤추던 옷자락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었다. 순식간에 연기 자락을 휩쓸어 갔다.

 

 

*

 

 

공터에는 휘만이 남았다. 주위는 더없이 고요했고 꺼진 모닥불에서는 연기가 맥없이 피어났다. 휘는 울고 있었다. 울부짖는 일 없이, 훌쩍거림 없이, 그러나 고요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잘 못 된 게 아닌가 싶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누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휘가 우는 이유는 감동해서라고, 휘도 아까 그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너무 아름다워서 울어버린 거라고, 그렇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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