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맙소사 우리 레이엔리가 벌써 900일이래요!
레이엔리의 900일을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부탁드려요!!!
2 회차
“어느 스캐너가 바이러스가 섞인 데이터를 백업해두어서 몇 달 치 기억을 날릴까.”
아이든은 한심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엔리카를 보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잘못으로 힐난을 받으려니 잔뜩 억울해졌다.
“요르하에서 파악하지 못한 신규 바이러스에다가 잠복 상태였다잖아. 너도 그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서.”
“네 백업 데이터까지 내가 관리해줘야 하냐?”
“됐어. 그런 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임무나 전달해줘.”
아이든은 엔리카의 포드로 요원 정보를 보냈다. 엔리카는 눈을 깜박거리며 보았다.
“이건 누구야? 임무는?”
“네가 데이터를 잃기 전에 동행하던 안드로이드야. 이 기기랑 진행하던 임무가 있다던데 그걸 지속하면 된다고 하더라. 그 임무는 나를 거치지 않고 그 안드로이드를 통해서 전달된 임무니까 그쪽으로 가서 전달받아.”
엔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 그리고. 조심해라.”
“왜?”
아이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안드로이드 널 싫어하는 모양이더라.”
“나를? 어째서?”
“그건 나야 모르고.”
자신을 싫어하는 이가 있다는 것은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엔리카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이든이 뒤를 가리켰다.
“마침 저기 오네.”
방금 아이든이 전송해준 정보에서 뜬 이미지와 똑같은 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B 타입, 레이피스. 엔리카는 다가가서 먼저 인사를 건냈다. 저 사람이 내게 앙금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나서서 풀어야 한다. 비록 이유는 기억나지 않더라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배틀러 레이피스. 저는 스캐너 엔리카라고 합니다. 전에 임무를 같이 했다고 들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엔리카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오래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틀러 레이피스에요. 임무는 포드를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쳐 지나갔다. 엔리카의 손이 허공에 놓였다가 어색하게 거두어졌다. 아이든은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다가 말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 사람이 악수도 무시하고 지나가냐?”
엔리카는 머리를 긁적였지만 그렇다고 기억나지 않던 것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
“긴장했나요?”
“아, 아니요.”
엔리카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손끝이 뻣뻣해졌고, 스크린 위에서 미숙하게 미끄러졌다. 엔리카는 조바심을 누르며 잘못 입력한 것을 수정했다. 레이피스가 말했다.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해요.”
엔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고르고 이번에는 제대로 입력했다. 실수했을 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신 차리고 임하자 전송까지 단숨에 끝마칠 수 있었다.
“다했......”
“그럼 이만 갈까요?”
전송을 마치고 그에게 대답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는 다른 곳을 보며 일어나고 있었다. 엔리카는 지었던 미소를 당겨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그와 함께 이동하는 길을 감싸 도는 침묵이 어색했다. 엔리카는 속으로 부담을 느끼며 끙끙 앓았다.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불편할 일일까? 엔리카는 자신이 그렇게 관계에 예민한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동료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처음이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이든이 때문인 것 같아.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나를 싫어하더라고 말해버리니까 괜히 신경 쓰이잖아. 엔리카는 속으로 제 오퍼레이터에 대해 투덜거리고 다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을 싫어할까?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무뚝뚝했지만 가끔 내 뱉어지는 말들의 어조는 다정다감했고 행동에는 배려가 깃들어있었다. 그러나 그 온기에 마음이 풀릴 때면 벼락같이 냉랭함이 쏟아졌다. 그 사이에서 엔리카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레이피스가 손을 들어 세웠다. 정지 사인이었다. 엔리카도 멈춰 서서 숨을 죽였다. 전방 25m 앞에 기계 생명체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기계생명체의 이동 경로와 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건드리지 않고 관찰하며 숫자를 세야 한다고 엔리카는 생각했다. 충돌이 생기면 규모를 세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레이피스는 벌써부터 석궁을 매만지고 있었다. 엔리카는 화들짝 놀라 레이피스의 팔을 덜컥 붙잡았다.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돌아보고 표정이 확 굳었다. 엔리카는 그의 신경을 건드렸나 싶어져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는 표정을 풀고 엔리카와 얼굴을 마주했다. 엔리카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그를 제때 만류했다.
소리를 내면 기계 생명체에 발칵될까봐 엔리카는 수신호로 의사를 전달했다. 근처에서, 관측. 레이피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기를 놓았고 엔리카는 팔을 풀어주었다. 엔리카는 기계생명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를 빠르게 파악했다. 반쯤 무너진 고층 건물을 짚어냈고 엔리카와 레이피스는 위치를 위로 옮겼다.
아이든은 경고했었다. 배틀러들은 무작정 기계생명체와 전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그런데 엔리카가 보기에 레이피스는 그렇지 않아보였다. 다행인 일이었다. 갑자기 달려들면 엔리카는 대비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쩌면 레이피스의 그런 행동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내심 품은 기대가 부풀었다.
기계생명체는 한 차례 지나가고 다시 지나가기까지 텀이 있었다. 정찰 임무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햇살과 공기가 한적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은 긴장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그럴 때 엔리카는 재잘재잘 이야기를 풀곤 했다. 이곳은 멀어서 소리가 들릴 일이 없었고, 임무 중 그 정도 여유는 레이피스는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정확히는 수십번 살펴보고 엔리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레이피스, 그거 아나요? 스캐너는 호기심이 왕성하도록 조정되어 있대요. 그러니까 호기심은 큰 동력이에요. 많은 인류의 학자는 알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해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대요. 그래서 스캐너들도......”
왜냐하면 엔리카가 입을 열어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기에, 평소에 은은한 표정으로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차갑게 돌변했다.
“엔리카. 그만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엔리카는 이야기를 뚝 그쳤다. 분위기가 서늘하게 내려앉았고 엔리카는 갈핑질팡하며 그의 눈치를 보다가 간신히 사과를 꺼냈다.
“미안해요. 난 그저...... 당신이 싫어할 줄 몰랐어요.”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엔리카는 속이 더 조여졌고 레이피스는 일어났다.
“......나는 잠시, 주변 정찰 좀 하고 올게요. 이곳에서 쉬고 있어요.”
지금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완곡하지만 명백한 표현이어서 엔리카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레이피스는 등을 돌렸고 인사말을 덧붙이기에는 날카로워서 엔리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보냈다. 그리고 울적한 고민에 빠졌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순간에 자신이 무슨 일을 했기에 그는 지금 나를 이렇게 대할까?
*
“역시 너를 싫어하네.”
“그런거 아니라니까.”
“예전에 다른 기기들과 웃고 지내는 걸 보긴 했는데.”
“......”
배려 없는 아이든의 말이 엔리카를 건드렸다. 엔리카는 반박하려다가 그냥 시무룩해졌다. 아이든은 모니터에서 몸을 돌려 엔리카를 보았다.
“애초에 이해가 안 되는데. 왜 그에게 친절을 받으려고 애써?”
“그건......”
그의 냉랭함에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본성은 친절하고 다정한 기기로 보였다. 그런 이가 유독 자신에게 그리 대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자신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면 내부 기관 어딘가가 막힌 듯 답답해졌다. 데이터를 전부 뒤져도 알 수 없는 이유 모를 행위로 인해 죄책감이 회로에 응어리졌다. 그와 지내는 시간이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엔리카는 망설이다가 그 심정을 간단히 축약해서 답했다.
“레이피스는 내 첫 동료잖아. 그러니 잘 지내고 싶어서......”
“저런, 엔리카. 나는 동료가 아니었어?”
“아니, 그게, 아이든. 장난치지 말고! 현장에 같이 나가는 동료 말이야!”
엔리카가 다급하게 말을 고쳤다. 아이든은 피식 웃었지만 곧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네게는 첫 동료겠지만 그에게는 아닐 수도 있지.”
“응? 전에 나와 그가 동료였던 적이 있었다는 그 얘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 너 말고. 다른 기기.”
아이든은 모니터에 대원 목록 데이터를 띄워놓았다. 수많은 이름과 인적 정보가 나열되었다. 아이든은 그것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엔리카는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저 정보를 받아보는 이들 에게는 다채로운 면을 가진 여러 기기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압축되어 보이겠구나, 싶어졌다.
“너는 그런 동료가 생긴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거든. 특히 그는 B형이니까 너보다는 다른 이들을 만난 경험이 많겠지. 그러니 네가 그를 생각하는 것만큼 너를 생각하지 않을걸? 그가 별 의미 없이 아무렇게 행동하는 것에 네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건......”
아이든의 말을 부정하기에는 근거가 없었으나 인정하기에는 내키지 않았다. 아이든은 손을 내저어 창을 내렸다. 창은 간단하게 지워졌다.
“연차가 늘어나면 너도 다른 동료가 생길 테고, 그때 되면 지금의 동료는 그렇게 중요해지지 않겠지. 그는 그저 수 명의 전 동료 중 하나가 될 거야. 그러니 엔리카, 그에게 연연하지 마.”
아이든은 그리 말했다. 엔리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이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왜?”
“네 말대로 언젠가 그렇게 멀어지게 될 수도 있다면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엔리카는 곧은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든은 삐딱하게 보았다.
“결국 지나갈 일인데, 굳이?”
“그렇지만 기억으로는 남을 테니까.”
“그거 한번 잃어버렸으면서?”
“하하하......”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엔리카는 그저 웃었다. 그와 풀어야 할 일이 있다면 풀고 싶다. 지금 그와 동료가 된 순간에 충실하여 잘 지내고 싶다. 돌아보면서 이 시간이 괜찮았다고 여기고 싶다. 아이든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상부에 네 임무와 동료를 교체해 달라고 건의를 올려볼 수 있어.”
“하지만 원하지 않아, 아이든.”
“알아. 하지만 나중에 원하게 될 때 말해.”
“고마워, 오퍼레이터.”
*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힐끔 넘겨보았다. 묻기로 결심하고 그를 살피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의 태도는 냉정하다고 보기에는 어설프다. 굳은 표정은 단순히 겁을 먹은 것 같다. 때때로 시선은 불안해서 먼저 표정을 돌리곤 한다. 점점 확신이 섰다.
“레이피스.”
엔리카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붙잡았다. 그리고 명확하게 물어보았다.
“레이피스, 저와 전에 임무를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원래는 그가 먼저 털어놓기를 기다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말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그는 영영 침묵할 것 같았다. 간접적인 물음들도 전부 걸러졌다. 그러니 이렇게 곧게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레이피스의 입가가 경직되었다. 엔리카는 자신이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음을 직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엔리카.”
그는 고개를 돌리며 그리 답했다. 그러나 엔리카는 명백히 알 수 있었다. 그건 결코 그렇게 어떤 일도 없었던 이의 반응이 아니다. 엔리카는 단호하게 되물었다.
“기록에 따르면 함께 활동한 기간은 최소 몇 달이에요. 그렇게 오랜 시간 같이 활동을 했는데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레이피스는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그래서 엔리카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기세로 옷자락을 붙잡았다. 레이피스는 한층 목소리를 냉담하게 깔았다.
“당신이 알 것 없어요.”
“내가 기억을 잃었지만, 그건 나의 일이었잖아요. 내가 궁금해 할 이유가 충분히 되지 않겠어요?”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두터운 벽을 앞에 둔 것 같았다. 자신이 알 영역이 아니라고만 반복하여 말한다. 스캐너 엔리카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엔리카는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한발을 내딛으며 외쳤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나요?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예요.”
“알려고 들지 말아줘요, 제발......”
레이피스는 감정을 끌어안고 속에 눌러둔 채 간신히 말했다. 일직선으로 나가던 엔리카는 주춤했다. 둘의 태도가 일순간 단단함을 잃고 출렁였다. 둘 다 흔들림을 가라앉혀야 했고 정적이 흘렀다. 태도를 먼저 갈무리한 것은 레이피스였다. 그는 다시 냉랭함을 모방했다.
“내가 말할 이유 없어요.”
“제발요, 레이피스.”
공방을 벌이던 대화들이 그치고 애원이 따랐다. 부드러웠으나 한층 치명적이었다.
“설마 그때 제가 무슨 잘못을 하기라도 했나요? 알려주면 안 될까요?”
레이피스는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엔리카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읽어낼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레이피스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되묻는 이유가 뭔가요? 그동안은 잘 지냈잖아요?”
“잘 지내요? 아니요. 나는 잘 지내지 못했어요.”
엔리카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 내게 선을 긋잖아요. 내게만 그리 냉랭하고. 무엇이 이유일지, 치열하게 고민해보게 되는 심정을 알아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당신을 만난 이후의 사소한 행동을 하나하나 돌이켜보고, 조심하고, 그래도 상처받고. 그랬음에도 원인을 찾지 못해 알지 못할 과거까지 거슬러가게 되었어요. 그러니 부디 말 좀 해봐요, 레이피스.”
레이피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어떤 말도 할 것 같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미동도 없다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감정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어떤 대답을 바라나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대답?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은가요?”
“레이피스, 나는......!”
“혹은 당신의 잘못이 맞다면 어쩔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나요? 내 행동이 당신이 원인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납득할 건가요?”
레이피스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어조는 더없이 차가웠다, 엔리카는 그 모습에 움츠러들었다. 그동안의 냉랭함은 나름대로 정도를 지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아니면 그냥 다정한 척을 원해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요. 괜히 과거를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이유를 알면 해결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안일한 마음이었을까?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꼬여있었다. 간단하게 눈 녹듯 풀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많은 것이 허망해졌다. 그를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가 앞으로 따뜻하게 대한다 한들 억지로 받아낸 태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정함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 그리 큰 욕심이었을까? 쥐고 있던 손이 풀리자 레이피스는 몸을 돌렸다. 돌아보는 일 없이 걸음을 떼어 멀어졌다.
그러나 레이피스가 떠난 자리에서 엔리카는 눈에 불꽃을 틔웠다. 바이저 뒤였지만 의지만큼이나 확실하고 선명했다. 엔리카는 스캐너였다. 어떤 정보라도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다짐하는.
*
며칠 후에 레이피스에게 긴급 연락이 떨어졌다. 엔리카의 몸체를 회수해오라는 임무였다. 해당 장소에 간 레이피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진 엔리카를 발견했다. 상부에서 전한 정보에 의하면, 해당 기기는 요르하 서버에 부정 엑세스를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방화벽의 보안프로그램은 엔리카를 공격하였다. 침입이 발칵 되고, 신원이 파악되었는데도 물러나지 않았다고 했다. 엔리카답지 않게 무모하게. 공격 끝에 침입한 엔리카를 파손시켰고, 더 나아가 정보에 접근했을 자아 데이터를 소거하였다고 했다.
레이피스는 엔리카의 피부에 손을 얹어 보았다. 외상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잠깐 잠든 듯 모였다. 그러나 감긴 눈이 뜨이거나 일어나 미소를 짓는 일은 없었다.
상부에서는 확인 및 재촉 메시지가 날아왔다. 엔리카는 서버와 연결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벙커의 구석에서 해킹을 시도했었다. 벙커 내의 원인 불명 사망은 다른 안드로이드가 알아서 좋을 것 없었으니 서두르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엔리카의 기기 몸체의 처리방법에 대한 지시가 따라 날아왔다.
레이피스는 포드가 띄워주는 메시지를 멍하니 올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nn회차
“B 타입 레이피스.”
벙커 복도를 걷던 레이피스는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안드로이드 중에서 타입 명까지 들먹이면서 그를 부르는 이는 없었다. 차라리 E타입이라고 불렀으면 모를까. 그 자리에는 O타입 의상의 안드로이드 한 기체가 서 있었다. 확실히 모르는 기기였는데, 어딘가 낮익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레이피스는 긍정했다. 요원의 정보를 쥐고 있는 오퍼레이터라면 이미 알고서 묻는 것이리라. 그쪽도 정말 신원을 확인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갈색머리의 안드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신원을 밝혔다.
“저는 O타입 아이든이라고 합니다. 당신과 동행중인 엔리카의 담당 오퍼레이터이지요.”
엔리카. 그 이름에 몸의 기기가 정지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레이피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답했다.
“그렇군요. 엔리카씨와 교신하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엔리카씨가 부탁한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당신에게 온 건 순전히 제 판단입니다. 뭐, 엔리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게 명백한데, 무슨.”
그는 한껏 투덜거리고 있었다. 레이피스는 경계를 서서히 세웠다. 만일 엔리카로 인해 저 오퍼레이터 또한 요르하의 기밀에 접근했다면 상부에 보고하......
“당신이 아무리 엔리카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렇지, 동료간의 예의라는 것은 지켜야 하는거 아닙니까?”
“예?”
......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지? 반문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맥락을 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해보려는데 아이든은 한층 화를 내었다.
“모른척하시는 겁니까?”
레이피스는 난감하게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라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아이든은 성을 내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엔리카 대원과 동행한 이후로 기체 파손 빈도가 무시 할 수 없을만큼 증가했습니다. 임무가 바뀌어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다른 대원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높군요. 좋습니다. 그 정도는 엔리카가 전투가 서툴러서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기체를 싹 갈아치워야 할 정도로 완전 파손된 경우는 넘어갈 수가 없겠습니다. 그 정도면 자아데이터도 손실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엔리카의 자아가 몇 번이나 리셋되었습니다!”
아, 그제야 레이피스는 이해했다. 그러나 항변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부정할 수 없이 레이피스가 개입한 일이었다. 그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으나 이유는 기밀로 감춰지고 행위만이 오롯이 그의 책임으로 남았다. 레이피스는 비난을 받아내었다.
“엔리카를 싫어하더라도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요르하의 일원이니 최소한의 책임은 지십시오, B 타입 레이피스.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당신 오퍼레이터에게 정식으로 항의를 넣을 겁니다.”
엔리카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 조차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이든은 마지막으로 쏘아붙이고 휙 돌아서 저벅저벅 사라졌다. 레이피스의 대답을 제대로 들은 기색도 아니었다. 반면 레이피스는 그의 말이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그 오퍼레이터의 착각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싫어하기에 협조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엔리카가 파손되었다니. 실제로 레이피스 자신이 엔리카를 제거하고 있는 현실에 비하면 얼마나 나은 오해인가? 그것이 밝혀졌다면 저 오퍼레이터는 경고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보 누출로 인한 조사가 들어가야 했을테고.
그러나, 그럼에도.
레이피스는 그 자리에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참을 그렇게 있어야했다. 안드로이들이 스쳐지나가는 그 벙커의 무채색 복도에서, 회전하는 지구를 보는 척 하며.
*
자신이 엔리카를 싫어한다는 오해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엔리카의 담당 오퍼레이터는 확신하는 것 같다. 엔리카에게서 전해지는 과정에 오해가 생겼을 것 같은데 그것이 어느 때일지 모르겠다. 그간 연속성이 없는 수많은 편린의 엔리카가 있었고, 너무 많은 방식으로 엔리카를 대했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엔리카는 그 모든 사실을 알지 못 한다.
맹세코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한다면 살해의 행위가 이리 끔찍할 수 없다. 엔리카와 보내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바라고 있을 리가 없다. 엔리카를 살리고자 노력할 리가 없다......
레이피스는 마치 오일이 입으로 잘못들어간 것 같은 쓴맛을 느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엔리카를 살릴 수 있을까?
레이피스는 엔리카와 마주하기로 한곳에 당도했다. 먼저 와있던 엔리카가 서서히 고개를 들으며 맞았다.
“어서와요, 레이피스.”
엔리카는 기기를 조작하던 창을 내리고 다가왔다. 기억을 거슬러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기에 통통 튀지 않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또한 언젠가처럼 레이피스 앞에서 잔뜩 긴장하면서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이번은 그런 엔리카였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엔리카. 그리고 여느때보다 평온해보이는 엔리카.
엔리카는 씨앗과 같았다. 기본 인격 프로그램을 속에 품고 생성된다. 그리고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자라났다. 언젠가의 엔리카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씨앗이 심긴 토양이냐 기후에 따라서 다르게 자라듯이.
그럼에도 엔리카는 엔리카임을 증명하듯 놀랍도록 똑같은 행동을 보기도 했다. 짓는 표정, 어느 순간 톡 뱉은 말, 굳게 지니는 마음가짐, 행동.
수없이 틔워지고 피어나고 꺼졌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 곁을 레이피스가 맴돌았다. 엔리카가 레이피스를 모르고 지냈던 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둘은 동료로 맺어졌다. 레이피스는 엔리카의 환경이었다. 레이피스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엔리카도 영향을 받았다. 엔리카의 인격 프로그램은 약동하며 데이터를 쌓았고 그런 엔리카를 레이피스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엔리카는 자라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으며 레이피스 또한 엔리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았다. 레이피스의 역할은 감시였으며 처형이었다.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식물들처럼, 진실을 향하고야 마는 엔리카를 꺾어버리기 위해서 존재했다. 최종적으로 엔리카에게 배정된 죽음을 실행하기 위해서 레이피스는 머물렀다.
그의 역할은 사신이었으나 그는 죽음에 괴로워했다. 어쩌면 적성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대상이 엔리카인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부는 그 자리에 레이피스를 못박았다. 임무 변경 요청은 기각되었다. 따라서 레이피스는 그에게 허용된 범위 내에서 노력했다. 정말 치열하게.
어느 번째의 레이피스는 매우 다정하게 굴었다. 달디단 애정으로 엔리카의 귀를 녹이고 눈을 가리고자 애썼다. 엔리카가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도록. 어느 번째의 레이피스는 냉랭했다. 어차피 사라질 시간이었다. 그러니 어떤 마음도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종래에는 실패했다. 결과는 어느 때나 똑같았으니, 마음이 파도처럼 부숴졌으니.
그리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앞에서 걷는 엔리카가 눈에 들어왔다. 딛는 걸음이 안정적이었다. 이번 생의 엔리카는 제법 오래 살았고 그만큼 많은 일에 능숙해졌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도, 전투도 해킹도, 그리고 거짓말도.
요르하에 대해 물으면 엔리카는 애매하게 웃으며 모른 척 했다. 그러나 이미 엔리카는 요르하를 기웃거리고 있었고 상부는 엔리카에 대한 경고 단계를 제법 높게 설정해둔 상태였다. 엔리카는 모르겠지만 상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레이피스 또한 상부에게 전달받았다.
그런데 엔리카는 말끔하게 행동했다. 상부의 전달을 받은 레이피스가 도리어 헷갈려질 만큼. 그래서 더 위태로웠다. 이번의 엔리카는 레이피스에게 공유하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레이피스에게 속내를 터놓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 레이피스는 언제 벼락처럼 집행이 떨어질지 짐작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이 무사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지시해준 좌표가 머지 않았어요. 음, 사막지대군요. 열기에 조심해요, 레이피스. 과열이 기기를 망칠 수가 있거든요. ...무슨 일 있나요, 레이피스?”
엔리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굴어서. 레이피스는 태연할 수 없었다. 엔리카가 의아하게 보았다. 레이피스는 목을 태우는 심정으로 물었다.
“엔리카, 날 좋아해요?”
감정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랑을 확인하는 자의 수줍음이나 애정을 얻고자 하는 자의 맹목은 아니었다. 그건 확신이 깃든 절망이었다. 그가 수없이 지켜본 결과 높은 확률로 엔리카는 레이피스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곤 했다.
“그건......”
엔리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것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레이피스는 서글프게 덧붙였다.
“그럼 요르하에 대해 알아내는 것을 그만두세요.”
이어서 엔리카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매서운 긴장이 감돌았다. 레이피스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내었다.
“그러면 당신은 기꺼이 내 곁에 머물테니.”
엔리카는 굳은 표정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레이피스는 점차 불안해졌다.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예리하고 뛰어난 지능은 이미 요르하와 레이피스와의 연관을 잡아냈을 것이다. 수상하게 여길것이고 이제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각오는 했으나 결과가 이리 나자 속이 쓰라렸다. 레이피스는 말을 물렸다.
“당신이 요르하를 의심한다는 사실은 잊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아까 그 말은 잊어 주면 좋겠어요.”
“아니요, 취소하지 말아줘요!”
엔리카가 확 다가와 손을 잡아챘다. 레이피스가 당장이라도 뒤돌아 도망칠 것 같이 굴어서 엔리카 또한 성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한발짝 다가서서 가까이 붙었다. 간절한 목소리로 엔리카는 물었다.
“....... 정말이죠?”
레이피스는 눈을 크게 떴다. 되물음의 여운이 울렸다.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 자신을 위해 꾸며진 가상현실 같았다. 방금 전의 빠른 체념이 비현실성을 키웠다. 그들이 이렇게 이상적인 선택지에 함께 놓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레이피스를 쥔 엔리카의 손, 전해지는 떨림, 긴장에 잠시 멈춘 호흡. 이 모든 것이 지금이 실제하는 순간임을 증명했다.
시간이 멎었다가 흐른 듯, 레이피스는 멈춰있다가 무너지며 엔리카를 끌어안았다. 간신히 잡은 이 순간을, 이 선택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그럴 수 있게 내가 도울게요. 부디 그래 줘요.”
엔리카도 그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품 안에 서로가 있었다. 불안하고 불안했을 그들. 끌어안은 두 안드로이드의 몸이 겹쳐지고 온기를 나누었다. 웅웅거리며 몸을 잘게 떨게 만드는 기계음이 잦아들때까지. 수많은 고민들로 인한 괴로움을 녹여낼 때 까지.
세워야만 했던 경계를 접어도 되며,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솔직하게 대해도 된다. 레이피스는 간만에 희망을 품었다.
서로가 사랑에 안주한다면 이번엔 영원히 평화로울 수도 있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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